2020년 10월 5일 월요일

중립한국 제6화) 크리스마스 2

중립한국 제6화) 크리스마스 2





에반스 일가의 입관 서류를 작성해주고,

또 중국 여자의 입관 서류도 같이 작성해주게 되었다.


영어 이름은 '에밀리 첸'이었으며,

중국 이름은 '진령령(陳玲玲)'이라고 하였다.


홍콩에 거주하는 광동성 출신의 중국인이었는데,

에반스 일가네 집에서 식모로 일하다가,

함께 홍콩을 탈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중국어는 할 줄 몰랐지만,

령령은 서툴지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어로 어떻게든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령령은 모자란 부분은 한자로 써주기도 하였다.


"아임 프럼 캉통."

"캉통? 캉통? 혹시 광동(廣東) 말인가? 히어? 디스?"


네가 광동(廣東)이라고 종이에 한자를 써주자,

령령은 "예스예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향은 광동이라고요? 가족은 고향에 남아 있고?"

"예예. 그래요."

"여기가 한국이라는건 알고 있죠?"

"조선. 알아요. 너무 멀리 왔어요."


에반스 일가를 따라온 령령은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오게 되어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말레이나 호주, 인도. 가는줄 알았어요.

이게 조선 배라는건 몰랐어요."


령령은 일본군이 무서워서 무조건 피난선에 탓지만,

기껏해야 말레이 정도로 갈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황 선장의 배를 탓다가 우리나라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홍콩이 공격받으며 많은 배들이 해상탈출을 시도했는데

대부분은 아직 중화민국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해안으로 도망쳤고,

영국인들은 말레이나 인도 방면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홍콩에서 한국 배를 타서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은 기구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무서워서…. 전쟁 끝날 때까지, 조선 있고 싶어요.

상하이. 난징에서. 일본군이 우리 중국 사람들, 많이 죽였대요.

영국군하고… 중국 사람들 모여서 싸우고 있는데….

일본군이 너무 많아서 방어하지 못한다고 해요.

홍콩에서도 죽일 것 같아서 무서워서 무작정 배를 탓어요.

그런데 조선에는 집도 친척도 없어서…."


령령은 상해와 남경에서 벌어진 학살을 

에반스 일가는 귀중품과 현금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몸만 달랑 피난온 령령은 이제는 다른 곳으로

피난갈 수 있는 처지도 되지 않았다.


"피난민 입관서가 통과되면 인도적 거류 자격이 나올 겁니다.

그럼 얼마동안 교회에서 머물수 있을 거예요.

일거리도 있으면 소개해드리죠."

"고마워요.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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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진령령처럼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도망쳐 오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부산에는 중국인보다는 일본인이 훨씬 많았지만,

황해도의 해주, 경상도의 인천, 평안도의 의주, 평양,

그리고 요동 지역 등 중국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대륙에서 탈출한 중국 화교가 많이 몰려와 있었다.


지금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지지하였는데,

지금의 만주국(滿洲國) 영토인

화북(華北)·산동(山東) 출신의 화교들도

만주제국의 오색기(五色旗)가 아니라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쓰며,

대개 국민군의 항일을 지지하고 있었다.


화교들이 모두 장개석의 지지자는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청국(淸國)과 만주족(滿洲族)에

억압을 받은 한족(漢族) 사람들은

청국 선통황제를 복벽(滿洲)하여 세운 만주국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만주국의 영토가

우리나라와 요동에서 바로 이웃하여 있고,

국방과 경제 측면에서 긴요하기 때문에,

국가를 공인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비록 우리 정부가 여러 열국 가운데 만주국을 공인한

얼마 안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론 역시 만주국은 정치가 어지러워

제대로 된 자주국(自主國)이라 할 수 없고,

국체가 민(民)에 본(本)을 둔 것이 아니라 

퇴위한 청국 선통황제가 일본군(日本軍)을 등에 엎고 세운

괴뢰국(傀儡國)이라 하여 복벽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실상 만주국의 정치도 일본 산동군과 화북군의 지배 아래 있어,

만주국과 관련된 외교·경제 문제는 우리나라 정부도

만주국 관리보다는 일본 장군과 상담하는 처지였다.


국내의 화교들은 화북에 세워진 만주국을 일본의 침략으로 보았고,

일본이 상해사변을 일으키고, 강남 지역까지 공격해오자

열렬하게 항일(抗日) 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우리 정부 측에

국내의 화교의 항일(抗日) 활동을

단속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보내고 있었다.


우리 국민들은 중국의 비참한 처지에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로 피난오는 화교가 늘어나며,

제3국인 화교와 일본인이 자주 충돌하는데도 불만이 있었다.


또 일본은 우리나라에 지극히 중요한 나라이니,

화교의 항일 활동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국익(國益)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자들의 주장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거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발행되는

욱일지(旭日誌) 같은 잡지(雜誌)에서는

연일 화교를 비난하며 기사를 내고 있었다.


「일한우호를 해치는 것은 대개 지나화교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민도(民度)가 높아 근면하고 깨끗하지만,

지나화교는 민도가 낮아 게으르고 더럽고 지저분하다.

지나화교가 피난하여 조선반도를 더럽히고 있다.」

「강남 출신이 아닌 만주국(滿洲國) 출신의 화북 화교가

중화민국(中華民國) 국적을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민국적(民國籍)을 주장하는 화교는 모두

무국적자(無國籍者)이니 추방해야 한다.」

「화교들은 지나사변을 피난 구실로 삼고 있지만,

지나 대륙은 화북은 북경의 만주국 정부,

강남은 남경의 왕정위 정부가 통제하고 있어,

내륙의 극히 일부 장개석 일파를 제외하면,

지나 대륙은 지극히 안정된 상태이다.

한국 정부는 사변을 피난 구실로 삼는 화교를 추방해야 한다.」


이같은 주장이 욱일지에서 흔히 올라오고 있었고,

우리나라 논객들 가운데서도 전부는 아니었으나

일부 의견에는 동조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지나치게 많이 모여드는 피난민들 때문에

화교거리는 물론 여러 도시의 치안이 어지러워 졌다.


류맹(流氓)이라고 하는 화교 피난민은

대부분 어선 같은 작은 배로 밀항하여 왔고

재산도 기술도 없이 이국땅에 찾아왔으니

막노동이나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거지나 깡패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전쟁이 터진 몇 년 전부터

폭증하는 「화교류맹문제」는 우리나라의 골치거리였다.


「사천성에 쫓겨간 장개석 정부를 따르는

국민군은 일본군에 연전연패할 뿐인데,

전황을 반전시킬 가능성은 없는거나 다름없다.

정통정부가 아니라 일개 군벌에 지나지 않으니

장개석은 이젠 무시하는 것이 좋다.」

「소위 화교들은 항일을 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자기 나라에서 항일을 하지 않고

우리나라 땅에서 항일을 하는 것인가?

안전한 중립국에서 깃발을 흔들지 말고,

너희 나라에 가서 총을 들고 싸워라.」

「화교와 일본인이 서로 시비를 걸어 폭행하는 사건이 빈발하고,

일본 외교관에게 ‘테러’를 준비하다 적발된 사건도 있었다.

지금 중국은 약하고 일본은 강하니, 일본의 항의가 염려된다.」


몇몇 화교들은 실제로 테러 활동을 시도하거나,

모의하거나 실행에 옮겼다가 체포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정부에 일본의 항의가 들어오게 되자,

화교들이 결성한 「항일단체」에 책임을 물어서

강제로 해산시키거나 조직원을 구속하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체포된 화교들이 장개석 총통 휘하에 있는

비밀첩보결사인 남의사(藍衣社)의 조직원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일본은 장개석 정부의 중화민국 대사관도

왕정위 정권의 대사관으로 바꾸려고 하였으나,

우리 정부에서는 미국·영국 등에서

장개석 정권을 정통정권으로 인정하고 있기에

중화민국 대사를 교체하지는 않고 있었다.


왕정위는 과거에는 명망있는 정치가였으나

일본에 협력하여 일본 점령지에서 화평정부를 만든 이래

항일을 주자하는 현지 중국인들에게 한간(漢奸)으로 취급되어

민심(民心)을 거의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왕정위 정권을 승인하는데는

주저함이 있다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우리 대사관은 장개석 국민정부를 따라서

중경(重慶)에 옮겨가지 않고 남경(南京)에 남겨져 있었으며,

왕정위 정권과의 교섭도 남경 대사관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중경(重慶)의 국민정부 측의 대표부로는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성도(成都)의 영사관에서 대행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우리 교민 보호나 무역 등의 문제 때문에

남경정부와 교섭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왕정위 정권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 편, 우리나라의 중화민국 대사관은

일단은 유지되고는 있었으나

장개석 정부와는 전쟁으로 연락조차도

쉽게 할 수 없을 정도 였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대사관 직원들이 부업을 하고,

국내 화교에게 모금을 하여서,

대사관 경비를 마련하는 곤궁한 처지라 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장개석 정부를 지지하는 미국군과 영국군을 치고,

인도지나 지역과 서태평양을 해군으로 봉쇄하고,

중경의 국민정부를 완전히 고립시켜 가는 와중에

장개석 앞으로 1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중화민국 대사관의 청천백일기가 언제까지 걸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온 교회 선교사에게 듣기로는

선교사들은 적극적으로 화교 선교를 하고 있고,

국교인 신도와 불교를 고집하는 일본인과 달리,

화교들은 비교적 개종에 호응이 좋다고 한다.


중경정부를 이끄는 장개석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어,

교인들 사이에서는 일본보다는

그나마 화교나 중국에게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진령령 역시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잘 되지 않았던 탓에

홍콩에서 부터 교인이었는지,

한국에 오고 나서 교인이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개종한 화교들도 그다지 신앙심이 독실하지 않고,

전통 유교(儒敎)·도교(道敎)를 함께 믿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중국(中國)은 곧 대국(大國)이라는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청조(淸朝)가 몰락하여 무너지고,

여러 군벌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일본에 침공을 받고 있음에도,

내가 만난 중국 화교들은 하나같이

대국(大國)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중국이 굴기(倔起)하여

한(韓)·일(日)을 능가하고

영(英)·미(美)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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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장의 배에 타고온 에반스 일가와 진령령 등

몇몇 영국인들과 중국인들은 당장 방을 구하지 못하여,

토마스 목사의 교회에서 숙식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기독교도로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는

여러가지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일손을 거들어 주었던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거류지에서는

마치 교회의 크리스마스에 대항하려는 듯이

일본 황태자의 생일인 12월 23일을 전후하여

「황태자 전하 탄신제」라 하면서

떠들석하게 축제를 열고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천장절(天長節, 천황 탄생일)이라면 몰라도

황태자 탄생일을 이처럼 화려하게 기념하지는 않았다.


일본 쪽과 사업을 많이 하여,

일본인 친구도 많고 풍속도 잘 아는 나 역시

12월 23일이 일본 황태자의 생일이라는 것은

올해 처음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야마무라 군의 이야기로는,

황태자의 생일을 화려하게 기념하는 것은

우리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개국이래로 벌써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열면서

연말의 명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대항하려고,

크게 행사를 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굳이 대항할 일이란 말인가….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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