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중립한국 제10화) 설날, 귀향




덜컹! 덜컹! 덜컹!

교회에서 흥아회 일당과 있었던
크리스마스의 소동도 어떻게든 끝나고,
나는 숙부님과 함께 귀향을 준비하게 되었다.

나와 숙부님은 열차표를 끊어서
경상도 산골의 고향 마을로 가는 기차를 탓다.

석유통제령 탓으로 자동차의 운행이 거의 없어졌으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나는 석탄은 건재하였다.

그래서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는
여전히 활발하게 운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버린 만큼
기차에 타는 승객은 늘어나고 있었다.

"쯔쯔. 이녀석. 눈에 멍든 꼴 하고는.
쓸데없는데 끼어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숙부님은 아직도 얼굴에 얻어맞아서
다친 흔적이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혀를 찻다.

"요즘 세상에서 교회 같은데
다니고 있으니까 얻어맞지 않느냐."

"저한테 교회 다니라고 권유한건
숙부님이 아니었습니까?"

나에게 교회를 다녀 보라고
권유한 것은 숙부님이었다.

특히 영어를 배우고, 서양인과 인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였는데,
지금은 어느새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타박하며 핀찬주고 있엇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교회에는 이젠 다닐 필요 없어.
내가 교회 다니라고 했던건
네가 영어도 배우고 서양인하고
인맥 쌓으라고 그랬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전쟁이 나고 보니까,
미국이든 영국이든, 서양놈들 세력은
동양에 발 붙일 데가 없을 것이다.
이젠 완전히 일본 세상이 아니냐?"

숙부님은 예전에는 교회에 자주 다녔지만
12월에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날 뒤로
바로 교회에는 발길을 끊어버렸다.

"추세가 돌아가는걸 빠르게 살펴봐야
장사를 할 수 있는 법이야."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숙부님은
여느 때처럼 설교와 자랑을 겸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솔직히 좀 시끄럽긴 했지만
지루하지 않게 갈 수는 있었다.

"내가 다른 놈들처럼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었으면
이렇게 번듯하게 살 수 있었겠느냐?
일찍 부산에 나와서 장사를 시작하니까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거지."

숙부님은 젊었을 때부터
재치가 좋고 수완가로 알려져 있었다.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숙부님은
확실히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농부였으며,
장남으로 농사일을 물려받은
우리 아버지도 평범한 농부이다.

하지만 숙부님은 단신으로 부산에 나와서
장사를 하여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나도 숙부님에게 도움을 받아서
상공학교(商工學校)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골에서 있었다면
소학교(小學校)나 기껏해야
중학교(中學校) 정도 밖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힘들고 고된 농사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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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읍내의 역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겨우 절반쯤 온 것이다.

산골짜기에 있는 고향 시골로 가려면,
여기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했다.

"이런 참. 이거 자동차도 없으니,
어떻게 그 산골까지 가면 좋겠냐?"
"교통편이 있는지 좀 알아보겠습니다.
짐도 많아서 걸어갈 수도 없으니까요."
"이거야 원. 비싼 돈 주고 산 차를
기름이 없어서 못 움직이다니…."

본래 숙부님은 명절에 시골에 올 때마다
자동차를 타고 시골길을 귀향하곤 하였다.

시골길에서 보기 드문
검은색 고급 자동차를 타고
요란스럽게 엔진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숙부님의 모습은
이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보기드문 명물이었다.

하지만 기름이 없으니
자동차를 움직이지 못했고
자동차는 숙부님 댁 마당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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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음메에-

나와 숙부님은 역 앞에 나와있던
우영감님의 소 달구지를 빌려서
마을로 타고 가게 되었다.

우영감님은 읍내에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돌아가는 길이라며 운임과 담배 조금을 받고,
나와 숙부님을 태워주게 되었던 것이다.

"소달구지라. 이런거 타는 것도 오랜만이구만."

숙부님은 덜컹거리는 소달구지에 타고,
시골길을 지나가서 고향 마을로 향해갔다.
달구지에는 숙부님이 타고 짐을 실어놓았고,
나는 옆에서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다.
숙부님이 가져온 짐은 대부분 선물이었다.

숙부님은 시골에 올 때마다 친척이나 이웃들에게,
차 한 대 가득히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들을
선물을 싣고 와서 나눠주면서 거들먹 거렸다.

자동차를 쓸 수 없게 됐음에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서,
분량을 좀 줄이기는 했지만,
선물은 많이 가지고 왔던 것이다.

"왜 차를 타고 오지 않았어? 기름을 안 파니까?"
"그렇습니다. 정부에서 석유를 통제하니 차를 못타게 됐죠."

우영감님이 물어보길래 내가 대답하였다.

"허허허. 자동차니 뭐니 해도,
기름 없으면 안 굴러가니까.
마을에도 신식 농업기계를
큰 돈 들여서 들였다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져서
낭패를 본 사람들이 많어.
거 풀먹는 소보다 못하구먼."

우영감님은 웃어대며 달구지를 끄는
말라빠진 농우(農牛)를 쓰다듬었다.

미국에서는 사람 손이 아니라
석유로 움직이는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트랙터를 수입하거나,
경운기 같은 농업기계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농기계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였으며,
농사는 대부분 일꾼이나 일소를 쓰고 있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재래식 농법 보다
과학적 농법이 효과적이라고 하여,
영농법을 보급하려 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시골 농촌에서는
성과가 지지부진 하다는 것이었다.

시골로 내려갈수록 풍경은 그야말로
개화 되기 이전의 이전의 '조선시대'나
다를바 없는 것이었다.

읍내에는 그래도 붉은 벽돌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많이 보였지만,
조금만 시골길로 들어가도,
계곡 사이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었다.

이른바,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타임머신'을 타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산림조성사업 때문에
화전이나 벌목이 금지되어
산에 숲이 좀 늘어났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저 산의 숲에는 내가 어릴 때
식목일에 심은 것들도 있었다.

길도 포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흙길이라서 사실 예전에는
자동차를 타고 올 때도
진흙탕길에 빠져서 차를 빼느라
고생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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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님. 아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숙부님과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는
본가를 먼저 들러서 새해 인사를 올렸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농사꾼이었으며,
약삭바른 삼촌과는 달리 순박한 시골 사람이었다.

"허허. 그래. 달호야. 전쟁이 났다는데, 네 사업은 잘 되어가느냐."
"하하하. 걱정마세요. 전쟁 덕분에 오히려 더 잘 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삼촌은 자신만만하게 웃어댔다.
실제로 삼촌의 사업은 전쟁 이래로 번창일로였다.

"윤태야. 너는 장가는 언제 갈거냐?
벌써 서른이 다 된 놈이 언제까지 홀아비로 살거야."
"제가 좀 더 제대로 자리를 잡고 나서요."
"자리를 잡기는 무슨. 나는 너보다 어렸을 때
벌써 장가가서 애들 낳았어.
너처럼 시내로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짓는 자식들도 벌써 다 장가갔다.
아무튼 빨리 장가나 가라. 멀쩡한 자식놈이
홀아비로 지낸다고 이웃 친척들에 부끄럽다.
좋은 규수는 얼마든지 소개해줄테니께."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서 하긴. 연애해서 장가 가려는 거냐?
그게 요즘 풍습이라지만 나는 맘에 안 든다.
도시 계집애들은 바람이나 들어서 정숙하지 못하니. 쯧."

아버지는 올해도 빨리 장가 가라고 타박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인사 올린 다음에는
동네를 돌면서 친척 집안에 인사를 올렸다.

고향 마을에는 같은 집안의 친척 어르신들이 많았다.

솔직히 어르신들 앞에서는 불편하기 때문에
명절도 아닌 평소에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지 않으면 또
나중에 귀찮아 지니까 어쩔 수 없는 관례였다.

큰할아버지 댁을 찾아갈 때는 특히 많이 긴장되었다.

큰할아버지는 이른바 종가(宗家)의 어르신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향교(鄕校)의 유생이기도 하여,
좋게 말하자면 전통을 지키는 선비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고리타분한 영감이었다.

큰 할아버지 댁은 오래 되었지만,
고향 마을에서는 가장 크고 넓은 기와집으로,
오래 되어 고풍스러운 모습에 위압감이 있었다.

"왜 그렇게 떠냐? 여기 오면 영감 회초리 소리가 생각나냐?"
"숙부님도 종아리 맞았습니까?"
"낄낄. 나도 맞기는 많이 맞았지."

나도 버릇이 없다고 종아리에
매를 맞은 적이 어릴 때 몇 번 있었고,
그것은 숙부님도 마찬가지였다.

"어흠. 달호 조카하고, 당질(堂姪) 윤태. 왔는가."
"예. 백부(伯父)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당배부(堂伯父) 님."

사랑방에 앉아 있는 큰할아버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양반 다리로 앉아 있었으며,
도포(道袍)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있었고,
긴 곰방대로 연초를 피우면서 나와 숙부님의 인사를 받았다.

"백부님. 이거 화과자(和菓子)입니다.
차하고 마실 때 드시면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달평아. 이거 받아놓거라."

달호 숙부님이 화과자 상자를 하나 내밀자,
큰할아버지 댁의 달평 당숙이 받아 놓았다.
달평 당숙은 나에게는 오촌 당숙이 된다.

부산에서 거류 일본인이 하고 있는
유명한 화과자 가게에서 사온 물건이었다.

"달호 조카도 윤태도, 머리가 좋아서 학문을 가르치면,
관직을 얻어서 가문의 이름을 빛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카들은 장사치나 할 짓을 언제까지나 하려고 하는 것인가."

큰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라
그저 관직을 얻는 것만을 최고로 알았다.

하지만 달호 숙부님은 공무원 시험 같은데 붙어봐야
요즘 시대에 공무원 봉급이 얼마 되지도 않는 것,
장사로 돈을 버는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놔야죠.
요즘 세상에는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곧
애국(愛國) 하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업(商業)은 말업(末業) 이거늘.
나라도 백성도 사치스러운 문물(文物)에만 빠져서
공상(工商)을 중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구본신참(舊本新參)하고 동도서기(東道西器)라 하였거늘
오백년 지켜온 본(本)과 도(道)를 모두 잃어서야 되겠느냐."

큰할아버지는 긴 곰방대로 연초를 피우며
눈을 지긋이 감고 자뭇 현인(賢人)처럼 말하였다.

"네가 일본 당과(糖菓)를 가져온 걸 보니,
일본하고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로구나."

"예. 그렇습니다."

"일본이 몇 년 전부터 중국하고 전쟁을 하고,
또 이제는 미국하고도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래도 장사가 잘 된단 말이고?"

"전쟁이 나니까 오히려 장사가 잘 됩니다.
미곡(米穀)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각종 잡화(糖菓)도 수출하는데,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라니까요."

"예전에는 일본산 물건이 좋다고 들여오더니,
이번에는 우리 물건을 수출하고 있다고?"

"일본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징병되어 가서
군수공장이 아니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농촌에서도 젊은 장정이 모자라 식량생산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미곡이나 물건이 많이 팔리는 것이죠.
점령지가 그렇게 넓어지고 있으니 병사가 많이 필요할 만도 합니다.
일본군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만들어
대동아 시대(大東亞 時代)가 열린다고 하니,
앞으로도 번청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달호 숙부님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이야기 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
일본 정부에서 내세우는 외교 시책이로구나.
동아제국(東亞諸國)을 묶어서
연맹(聯盟)으로 한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만이 아니라
필리핀, 말레이나 인도까지도 한 나라처럼 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 몽고의 한 가운데 있으니,
앞으로 무역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달호 숙부님이 대동아공영권의 밝은 미래 전망을 이야기 하자,
묵묵히 듣고 있던 달평 당숙이 갑자기 끼어들어 왔다.

"대동아공영권? 허허.
달호 형님은 왜놈들 본성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내가 동경에서 지진이 났을 때,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아시오?"

달평 당숙은 이를 갈면서 옛날에
자신이 동경 대지진 때 경험을 이야기 하였다.

"왜놈들이 죽창(竹槍)을 들고 다니면서,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탓다면서 찔러 죽이고 다녔소.
조선 사람을 색출해서 잡는다면서,
쥬고엔고짓센이라느니 말해보라고 시키고.
나도 그 때 죽을 뻔 했단 말이오."

달평 당숙은 젊은 시절,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 전 쯤에,
일본으로 일하러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하필이면
동경에서 크게 지진이 나서
도시가 거의 다 무너지고,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는,
큰 참사(慘事)가 있었다.

그러자 일본 사회가 흉흉해져서
자경단을 만들어 치안을 유지한다고 했는데,
조선인이 약탈을 하고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들이 많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경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황제 폐하가 일본 천황에게 위로 친서를 보내고,
학교에서는 일본인들과 재일교포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와 위문금까지 모금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학살 사건 소식이 들려오자,
국민들이 충격을 받고, 양국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에서 사죄 전문을 보내고,
자경단 가운데 주동자를 체포하고 처벌하며,
또 생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조치를 하여,
양국 간에 국교가 틀어지지 않고 상황이 수습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 이래 일본을 경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니. 너는 20년 전 일을 언제까지 이야기 하는 거냐?"
"그 때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일이오."

20년 전의 일이지만, 달평 당숙은
아직도 일본인을 혐오하고 싫어하게 되어,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일하던 것을 때려치우고,
도망치듯이 시골로 돌아와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달평 당숙의 뿌리 깊은 마음의 상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는 했다.

"이만 그만해라. 싸우지 마라. 아무튼, 왜놈들은 믿을게 못된다."

큰할아버지는 담배대를 피우면서 말싸움 하듯이
다투려는 달호 숙부와 달평 당숙을 저지하였다.

"왜인(倭人)들이 본래 성품이 간사하여,
상대가 강하면 굽히고 신(臣)을 칭하는데
상대가 약하면 대뜸 왜구(倭寇)가 되는게,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왜인들의 습성이니라."

큰 할아버지는 시골 노인으로
산림(山林)의 처사(處士)를
자칭하는 분이시지만,
정치니 역사니 국제정세니 하는데
아주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문도 언제나 열심히 읽어서,
큰할아버지의 서재방 한쪽 구석에는
큰할아버지가 읽고 정리해둔
신문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산골짜기 시골집에 틀어박힌 작은 서재였지만,
큰할아버지에게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염려하고 걱정하는 곳이었다.

본인이 직접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신문에 사설 기고를 올리는걸 좋아하였고,
단문이나마 신문에 실리면 무척 기뻐하여,
신문을 모아 자신의 개인 문집(文集)의
초고(草稿)에 넣어두고 있었다.

한시(漢詩)와 서예(書藝) 만큼이나
사설기고를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었다.

"옛날 명조(明朝) 만력(萬曆) 20년 임진년(壬辰年)에도,
왜군(倭軍)이 쳐들어와 왜란(倭亂)이 크게 있었고,
우리 가문에서도 그 때 조상님들이,
의병(義兵)으로 나서서 싸웠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소학교 때부터 역사시간에 배운 적은 있었다.
역사 선생님들은 늘 애국심(愛國心)과 충성심(忠誠心)을 강조하며
특히 이순신 장군님을 충군애국(忠君愛國)한 명장으로 가르쳤다.

"지금은 우리 대한국(大韓國)이 상하(上下)가 일치단결하여
국력(國力)이 만만치 않고 촌척의 분열이 없으니,
외국에서 감히 침략해오지 않고 있지만,
만일 우리 대한국(大韓國)이 국력(國力) 약하였고,
상하가 서로 단결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면,
지금 중국(中國)의 모습이 우리 모습과 같이 될 것이다.
청조(淸朝)가 무너지자, 여러 군벌(軍閥)로 갈라지고,
외세(外勢)에 무너지고, 양민이 학살되고 있는,
중국(中國)의 모습을 보아라. 아국(我國) 국민들도
늘 이를 보고 경계해야 할 것이야."
"예예. 명심하겠습니다."

큰할아버지는 어려운 한자말을 쓰면서 훈계하길 즐겨하였다.
솔직히 이럴 때는 묵묵히 듣고 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때는 그저 명심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일본(日本)이 하는 짓이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 것이 많고,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어긋나게 하는 것이 많으니,
여러 나라의 인심(人心)을 얻지 못하는 것 같구나.
또 나라의 장정을 모두 전쟁터에 내보내고,
물산(物産)이 부족해질 정도로 전쟁을 하면,
어떻게 장차 감당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은 흥성하게 보여도 장차
일본의 세력이 오래 가지 못할 듯 싶다.
소인(小人)을 가까이 하면 화(禍)를 입는다 하니,
너희도 일본하고는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도록 해라."
"예예. 명심하겠습니다. 백부님."

달호 숙부님은 큰할아버지 앞에서는
예예 거리면서 알겠습니다 하였지만,
잠깐 사랑방에서 나와서
마당에서 바람을 쐬고 있으니
나에게 투덜거리며 푸념하였다.

"에잉. 시골 늙은이가 뭘 안다고 
종가집만 아니면 찾아오지도 않을텐데.
너도 잔소리는 듣기 귀찮지?"
"하하. 언제나 저러니까 익숙해졌죠."
"백부님은 한학(漢學)을 배웠다고
무슨 세상 이치에 죄다 통달한 것마냥 군단 말이다.
요즘 세상이 어디 고리타분하게
좀이나 슬어있는 옛날 책에서
공자님 말하는 '이치' 대로 돌아가느냐?
백부님이 이렇게 큰 집에서 거들먹거리면서
글이나 쓴다면서 소일거리 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전부다 내가 하는 미곡 장사 덕분이고,
어차피 우리 동네에서 사가는 미곡은,
일본에다 파는게 태반인데 말이다."

큰할아버지네 집은 고향마을에서는
상당히 많은 농지를 보유한 큰 지주(地主)이며,
소박을 많이 두고 있어 생활에는 여유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무역상회를 하는 숙부님도
매년마다 많은 미곡을 사오고 있기 때문에,
뒤에서는 고리타분한 늙은이라고 욕하면서도
종가이기도 하여 사실 함부로 굴 수는 없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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