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4일 목요일

중립한국 제5화) 크리스마스





이른바 '대동아전쟁' 소식은 연일 신문에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 한국 신문사에서는 종군 특파원들을 출국시켜,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는 여러 전선에 내보내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특별히 우리나라 특파원을 제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기자들에게 '황군(皇軍)의 전과(戰果)'를

취재하여 알리도록 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설에서는 일본군이 우리나라 언론사를 거쳐서

자신들의 전과를 자랑하여, 우리나라의 여론을

친일(親日)로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추측하였다.


그래서 종군 기자의 보도에도 통제가 있어서,

송고한 기자가 중간에 검열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였다.


그래서 전쟁 소식은 사실 지겨울 정도로

신문에 많이도 올라오고 있었으나,

아시아는 물론 만국(萬國) 운명이 걸린

건곤일척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신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록 우리나라가 중립국이라 하나,

전쟁의 영향은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의 동향은 누구에게나 궁금한 소식이었다.


신문사들의 판매부수는 날개 돋힌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가 전쟁 소식을 궁금해하고 또 알고 싶어하였다.


워낙 일본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에

내년까지는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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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났지만, 올해 12월 25일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예배를 보던 교인들은

얼굴이 어둡고 상심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대부분 전쟁 소식 때문이었다.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친미(親美) 성향을 가지고

미국을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국 유학을 잠깐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미국의 국력과 문화를 일본보다 크게 우위로 보고,

거의 미국을 숭상하다시피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을 이기고 있으니,

무력한 미국의 모습에 크게 상심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기독교 신도들 가운데는

일본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열성적인 신자 가운데 많이 있었다.


개국(開國) 이전에는 기독교 박해가 있었으나

개국을 하며 기독교를 공인하여 박해를 중단하였고,

교회의 개설이나 개인적인 신앙 활동에서는

정부의 어떤 간섭이 없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신도(神道)를 국교(國敎)로 하여

천황(天皇)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모시며,

일본 내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일본에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례가 아니라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의식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인 기독교 신자도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본인 목사들도 그래서 공공연하게 신사에 참배하곤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옹호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옹호하는

'이단적'인 주장이라 하며 매우 싫어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대개는

우리나라에서도 국기를 앞에 두고

국민의례를 올리게 하는 것과 같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나 역시 신도를 믿지 않아 신사참배는 하지 않으나,

대개 궁성요배와 같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학교나 관공서에서 국민의례를 하면서

페하의 만세무궁(萬歲無窮)을 기원하는 것과

형식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이야기를 듣는 일본인들도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 역시 국민의례는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여 항변하였는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 하였다.


우리나라 목사들은 이것으로 논쟁하면,

우리 황제(皇帝) 폐하에게 의례를 하는 것은

인간(人間)인 군부(君父)를 공경하는 것이고,

군부(君父)가 존귀하다 하나 하느님 곧 상제(上帝)보다

금상 황제 폐하가 더욱 높다고 하지 않으니 우상숭배가 아니며,

기독교를 믿는 서양 여러 나라에서도 군주를 공경하는 것과 같으니,

천황(天皇)을 인신(人神)으로 숭배하는 신도(神道)처럼

인간을 우상숭배하는 그릇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아무튼 이 같은 교리 논쟁은 머리 아프고

실속이 없어서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또 일본인들은 신도(神道) 이외에도

불교(佛敎)를 많이 숭상하였는데,

이 역시 불교를 싫어하는 우리 목사들이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개국한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불교(佛敎)가 부흥하는데

일본에서 지원한 바가 많았다.


개국한 이래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불교(佛敎) 승려들이 서양 기독교는 공인하면서,

불교는 배척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서,

배불(排佛)을 철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로서 수백년간 이어지던 배불정책이 중지되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었고,

승려를 비천(卑賤)하다고 보지 못하게 했으며,

불사를 마음대로 열 수 있게 됐으며,

사찰을 자유로히 창건·중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일본 불교 승려들이

배불을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승려들이 이를 고맙게 여기고

일본 승려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일본인들은 불교를 숭상하여 거류지에다가

자기들 종파의 불교 사찰을 지었으며,

또 우리 예전 사찰을 창건(創建)·중건(重建)하는데

일본인들이 도움을 주고 돈을 많이 시주하기도 하였다.


일본 승려들은 불법(佛法)이 우리나라에서 왔으니

이를 돌려주는게 마땅하다 하며 정당화 하였다.


이 때 일본인들이 불교에 많은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일본과 가깝고 일본인 거류민도 많은

영남지방에는 불교가 크게 흥성했다.


우리 승려들이 당초에는 이를 좋게 보았으나,

몇몇 승려들이 과도하게 친일(親日)하여,

서로 간에 종파(宗派)를 갈라 크게 다투기도 하였다.


특히 종명(宗名)을 지칭하는 것이

하나의 논란 거리가 되었으니,

우리 불교가 500년 동안 쇠퇴하며

종명이란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끝내 황실(皇室)에서 개입하여 중재하게 되었는데,

능침사(陵寢寺)·조포사(造泡寺) 같은 오래된 사찰은

궁내부(宮內府)에서 관리 아래에 두도록 하여,

사찰을 놓고 다투는 분규를 억제하였다.


또한 종파(宗派)를 칭하는 문제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조계산 송광사에 머무르며

우리 불교의 중조(中祖)가 됐으니,

이를 근거로 조계종(曹溪宗)을 세우게 하였다.


조계종을 세우면서 국내 명망있는 산사(山寺)가

조계종에 모두 소속되게 되었고,

명망 있던 용성 스님이나, 만해 스님 같은

스님들을 국사(國師)로 임명하였으니,

정통하고 청정한 불교 교단이 서게 됨으로서,

종파를 놓고 다투는 문제는 이로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타 종을 칭하는 소규모 종파가 없지는 않으나

정통 종파로 인정받지 못해 규모가 작고,

일본계 불교 종파가 보유한 사찰은

거류지에 만들어진 신건 사찰에만 머물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평소에는 신도(神道)의 신사에 다니면서도,

신도(神道)에는 장례식을 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에,

죽게 되면 정토종(淨土宗) 사원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작은 비석처럼 생긴 묘(墓)에 유골을 봉납하였다.


아무튼, 일본의 지원과 간섭,

그리고 거기에 우리 승려들이 반발하며

우리나라 불교가 크게 성장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지리멸렬하게 없어졌을 것이라고 하며

일본 때문에 불교가 다시 부흥하게 됐다고 싫어 하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꼭 그렇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종교이고

불교는 우리나라에 뿌리박힌지 오래된 종교이며,

우리 친척들 가운데도 불교 신도가 많았다.

또 억불을 하는 와중에도 황실과 늘 가까웠으니,

억불정책이 철폐되면 부흥하는게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아무튼 우리 기독교 교인들은 대개

천황(天皇)과 신도(神道), 불교(佛敎)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일본을 좋아하지 않아, 일본의 승리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성탄 예배는 예년보다 더욱 엄숙하고 격앙된 분위기였으며,

우리 한국인 목사들은 예배에서 일본군(日本軍)의 만행을

날카로운 어조로 규탄하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여러분! 상해와 남경에서 일본인들이

중국인을 수없이 많이 죽인 것을 알고 게십니까?

일본 장교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서로서로

누가 더 사람을 많이 죽이는지 겨루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 만이 아니라,

중국(中國)에서 일본군이 약탈과 학살을

많이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비난하였다.


수 년 전에 중국의 상해와 남경을 일본이 침략했을 때,

일본군대가 중국인을 수없이 많이 죽였으며,

아직도 중국 각지에서 양민학살이 끊이지 않는다 했다.


내가 아는 사람에게 듣기로도 분명히 사실이었고,

이 사실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상해와 남경에는 우리 한국 사람도 많이 있었는데,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우리나라로 도망쳐 오면서,

목격한 이야기가 신문과 잡지에 많이 실렸으며,

일본군이 중국 사람을 모두 죽인다는 이야기가

마을마다 널리 퍼져 있어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두 장교의 소름끼치는 참수경쟁(斬首競爭) 이야기는,

그 장교들이 우리 신문과 인터뷰 하며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이야기 하여

신문에서도 크게 실리게 되었다.


남경과 상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몇몇도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되기도 하였고,

이에 우리 정부가 일본 대사관에 항의를 했는데,

[전쟁에서 중립국 민간인이 희생되는 것은 유감이나,

중국 위장병을 단속하다가 불가피하게 휩쓸린 것]이라는

떨떠름한 유감 표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나마, 일본군이 우리 태극국기를 보면

중립국이라 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경에서는 남경에 있는 우리 영사관에

중국인 피난민이 가득히 밀려왔었고,

일본군이 영사관은 침범하지 않았으나

영사관의 문 앞과 담벼락 바로 밖에서는

크게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상해와 남경에서 우리 외교관들이

중국인을 함부로 죽이는걸 막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우리 외교관들이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하여

중립을 어기고 일본군을 방해하고

중국인을 편들고 있다며 

우리 정부에다가 항의하였고,

주중외교관들이 여럿 교체되기도 했다.


[본 기자가 방문한 상해 인근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검은색으로 태극(太極)과 팔괘(八卦)를 그려놓았는데,

그 마을의 중국사람에게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귀자(鬼子, 중국인이 일본인을 무서워하여 부르는 말이다)들이

태극을 꺼리고 무서워하여 가까이 하지 않는다기에

귀자를 쫓을 부적으로 그려놓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무식한 사람들이 이웃나라의 국기가 태극기인줄도 모르고,

외교이니 중립국이니 하는 것도 모르고 하는 것일테지만,

태극무늬를 부적마냥 곳곳에 그려놓은 모습이 참 딱하였다.]


또 이렇게 중국인들 가운데 무식한 자들이

태극무늬를 일본군을 쫓는 부적처럼

쓰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인인 토마스 목사님은

조국과 전쟁하는 일본 쪽에

적대의식을 가지고 있을만도 한데,

설교에서는 굳이 표출하지 않고

일본을 언급하지도 않고 그저

세계 평화와 주님의 보호를 바란다는

원론적인 기도만을 하였다.


교회 일을 도와주면서 사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니,

토마스 목사님 역시 일본의 '비겁한 기습'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미국에 주님의 보호가 있을 것을 기도하고 있으나,

목사의 신분으로 평화를 이야기 하는게 마땅한 교회에서

전쟁과 갈등을 설교에 올리는 것은 꺼려지고,

또 미국인이 한국인을 선동하여 전쟁으로 몰고 간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 싫어서 굳이 언급을 피하는 것이라 했다.


'나'는 토마스 목사님의 인격과 신앙심에 존경이 갔으며,

최근 심로가 많은 목사님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목사님은 교회 일을 하는 것 외에도

중국에서 피난을 오는 중국인이나 서양인 피난민을 

도와주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특히 12월 들어서는

일본의 공격으로 전투가 계속되는 홍콩에서 많은 피난민이 있었다.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서는 영국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어,

작은 도시임에도 함락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고 하였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화물선 선장 황 선장(黃 船長)이

홍콩에 머물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탈출을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들 만이 아니라,

홍콩의 중국인이나 영국인까지 태우고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오니까 온갖 배가 우글우글 몰려와서

그 크던 홍콩항만이 마비될 지경이었소.

우리 배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 같은 것이었는데,

사람들을 많이 태우고 오느라 식량과 식수가 부족해서 큰일이었소.

이게 사람 돕는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황 선장은 여러 사람을 화물선에 태우고 홍콩을 빠져 나왔는데,

뱃삯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고생이 너무 심해서

이득이 될 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인도나 호주로 가길 바랬지만,

그쪽은 일본 해군이 막고 있을게 뻔하고,

운 좋게 갈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돌아오겠소?

우리나라로 데려올 수 밖에 없었지."


황 선장은 중립국 선박이라고 하여도 일본 해군이

자기들 적국(敵國) 방향으로 가는 배를 임검한다는 것을

이유로 대서 거절하고 한국으로 오는 항로를 잡았다.


황 선장은 홍콩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부산항에 내려줬고,

토마스 목사에게 요청하여 교회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황 선장처럼 극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중국의 조계지와 아시아의 식민지를 떠나서

많은 피난민이 중립국인 우리나라로 모이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는 것은 주로 이들에게

입관서(入關書)를 작성해주는 것으로,

나는 무역일을 하느라 서류 작성은 익숙했기 때문에,

입관서류를 작성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 선장의 배에 타서 홍콩을 탈출하여

부산에 도착하고, 지금 교회에 머물고 있는,

영국인 에반스(Evans) 가족과 면담하였는데,

모두 여러 날 동안 배를 타고 오느라 초췌하였다.


"일본이 우리 대영제국(Great Britain)을 공격해오다니….

홍콩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믿기지 않았소."


홍콩에서 사업을 했다는 제임스 에반스 씨는

중국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도,

영국군이 주둔하는 홍콩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대개 설마 일본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세계 제일의 대국이라고 오만하게 까지 굴던 영국인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은 탓인지 신체적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더욱 초췌하게 보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공격해오고,

영국군이 홍콩을 방어할 가망이 안보이자,

서둘러 탈출하게 되었는데 황 선장의 화물선에

탈 수 있었던 것도 기적적인 것이었다고 하였다.


"대비를 했다면 미리 호주나 인도로 피신했을텐데.

홍콩에 남겨둔 재산이 걱정이오. 이러다 파산할지도 모르니."


당연히 급히 도주하느라 재산은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였고,

황 선장에게 주었던 배삯도 금시계로 지불할 정도였다고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나라는 안전합니다. 중립국이지 않습니까?"

"후우. 솔직히 말하면, 코리아의 '중립'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소.

여기는 일본의 바로 코 앞에 있는 나라가 아닌가?

저 해협 너머가 바로 일본 땅이고, 일본 군대가 있지요?"


교회에서도 불안해하는 제임스 에반스에게

우리나라는 안전하다고 진정시켜 주었지만,

제임스는 교회 창문 너머로

부산항, 대마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산이 일본 본토와 바로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산이 상해나 홍콩보다 안전하다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중립국이라고는 해도

우리 한국은 '적'에게 완전히 둘러쌓인 곳이었다.


"이봐요. 여기서 캐나다나 미국으로 갈 방법은 없소?"

"지금 직접 갈 수 있는 여객편이나 비행기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른바 '공산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소련과는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근래에 관계가 조금 개선되고 있으나,

민간인이 자유롭게 왕래하지는 못하였으며,

외교 연락 관계과 곡물수출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시피난민에게 임시로 거류 허가를 주겠다는 정책이 있어서,

서류를 제출하면 거류 허가는 어렵지 않게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머물도록 하세요."

"음. 아무튼, 고맙소."


제임스 에반스는 내가 써준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마 이 영국인 사업가는 자신이 한국에서

전쟁 피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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