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2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2

ㅁㄴㅇㄹ(119.196) 2020.09.16 00:24:58조회 0 추천 0 댓글 0




2) 전쟁의 경과




청국(淸國)이 우리나라를 치면서, 서양 열국(列國)에게 이는 내방(內邦)의 문제요. 외국(外國)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 선언하고, 어기는 나라와는 장차 통상(通商)을 금(禁)하도록 할 것이으니 우리나라의 영사관을 닫으라 하였다. 하지만 여러 나라들이 영사관(領事館)을 개칭하여 연락소(連絡所)로 하였을 뿐 영사관을 닫지는 않았다. 이는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자국 국민을 염려하여 이렇게 했던 것이다.




청국 군대가 먼저 요동에서 압룩강을 넘어서 공격해왔는데, 마을을 덮쳐서 방화하고 약탈하는게 극심하였고 서북 백성들이 많이 살상되거나 잡혀가게 되었다. 이 때 청군에 잡혀가서 욕을 본 여인들이 매우 많았다. 이에 백성들을 산성(山城)으로 도망치게 하고, 서양(西洋) 총포(銃砲)로 산성에서 수비하게 하였으니, 청국 병사들이 총포를 두려워하여 감히 산성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평양성(平壤城)에서 우리 관군(官軍)이 평양성을 공격하는 청군과 맞서 싸워서 크게 이겼다. 이에 청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양에서 머물게 되었고, 서울에서 지원군을 북쪽으로 올려보내자 마침내 평양에서 패퇴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평양대첩(平壤大捷)이라 한다.




또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서 의병(義兵)이 많이 일어났으니,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뜻이 있는 젊은이들은 앞다퉈서 총을 들고 청군과 싸웠다. 전부터 청국의 횡포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뜻 있는 사람들은 장차 국난(國難)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여, 가산(家産)을 들여서 총칼을 삿으며, 모두 호환(虎患)을 피하고 사냥을 하고자 삿다고 하면서 집에 두었다가 오랑캐와의 싸움에 나섯으니 백성들이 이 때 의병으로 나섯던 사람들의 뜻이 대견하게 여겼다.




그 가운데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安泰勳)이 가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때 나이가 열여섯 소년인 안중근(安重根)이 관군(官軍)에서는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는다고 분하게 여겨서 총을 들고 부친의 지휘하에 의병으로 나섯기에 나라의 사람들이 그 의기(義氣)를 장하게 보았다. 안중근은 담력(膽力)이 대단하고 사격(射擊)을 잘하여 나이가 어렸음에도 사람들이 모두 큰 일을 할 것이라 하였는데, 과연 의병으로 나서자 청군을 여러명 쏘아죽여 공훈을 세우고, 나중에 나라에서 훈장(勳章)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개국(開國)하고 기독교(基督敎)가 들어왔을 때, 서울과 삼남(三南)은 뿌리있는 양반 가문이 많고 유불(儒佛)의 기풍이 성행하여 기독교 교세가 흥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북 지역은 상인(商人)이 많고 유학(儒學)이 흥성하지 않아 기독교도가 많았다. 그래서 서양인 선교사도 많았는데, 청국 군대는 선교사를 양이(洋夷)라 미워하여 마구 잡아 죽였으니 서북에서 서양인도 많이 잡혀 죽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로서, 본래 영국(英國) 사람으로, 우리나라가 개국(開國)헀을 때 기선(氣船)을 타고 들어와 평양에서 선교를 하면서 교회(敎會)를 열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전쟁이 나도 교회와 신도를 버릴 수 없다 하며 피신하지 않고 있었는데, 평양성에서 청군이 싸울 때, 청군이 교회를 불태우고 토마스 목사를 끌어내서는 참수(斬首)하여 죽였다. 우리 백성들이 이 모습을 보았는데, 토마스 목사가 청군에게 끌려나와서도 매우 의연하여 성경을 뿌리고 기도문을 외웠다고 하니, 서양인들이 이를 듣고서 토마스 목사가 순교(殉敎)하였다 하여 매우 대견하게 보았고 또 슬퍼하였다. 평양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교인들이 토마스 목사의 시신을 거둬서 교회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 순교자의 무덤이라 하여 찾아오는 교인이 많다.




청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와 포악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며 행패를 부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서양인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신문(新聞)과 서한(書翰)으로 열국(列國)에 이 모습을 전하니, 열국(列國)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고 또 청국(淸國)이 포악하다 하여 싫어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평양에서 청국을 물리치자, 이를 훌륭하게 여기고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지만 약하지 않다 여기게 되었다.




청국이 또 군함(軍艦)으로 황해에서 공격해와서 우리 배들을 위협하였는데, 영국에서 사왔다는 청국의 북양함대 군함은 크고 강했으며, 우리 군함은 작고 약해서 청국 군함과 싸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서울과 삼남(三南)을 오고가던 조운기선(漕運氣船)이 모두 단절되었고, 서울에서는 쌀값이 크게 올라가서 백성들이 괴롭게 되었다. 이 때, 서울에서는 쌀을 매점매석 하는 자들이 있어, 잡아들인 다음 종로에서 주범은 총살(銃殺)하여 죽이고 쌀은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또 청국은 영국(英國)에서 상선(商船)을 사다가 병사를  태우고 충청도에서 상륙하게 하였다. 우리 군대는 영국 깃발을 보고 방심하다가, 청군이 내려와서 크게 놀랐다. 충청도에서도 상륙한 청군이 만행을 저질러 사람이 많이 죽었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한양의 군대를 철도로 충청도로 내려보내고, 또 경상도의 군대를 충청도에 보내서 청군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이 때, 경상북도 영덕에 사는 신돌석이라는 소년이 나이가 16세였는데, 해주의 유명한 소년장군 안중근처럼 청군의 행패에 분노하여 싸우러 나서려 하였지만, 관군에서는 나이가 어려 받아주지 않는다 하여 친구들을 모아 의병을 만들고 경상도에서 기차를 훔쳐타고 충청도까지 찾아가서 청군에 맞서 싸웠다. 신돌석이 용감하고 무용이 뛰어나서 군공을 여러번 세워서 사람들이 신돌석도 대단한 소년장군이라 하였다.




충청도에 상륙한 청군은 우리 의군에 쫓겨서 패퇴하게 되자 영국배에 다시 타고 도망쳤는데, 영국 선장은 자기들은 영국배라 하여 공격해오면 영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 엄포를 놓아 공격하지 못하고 청군이 도망가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기고, 그 상인을 보고 영국이 강한 것만 믿고 횡포하다하여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청군이 서양 나라들의 위세를 염려하여 서양 깃발을 달고 있는 배는 공격하지 건드리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서양인이 돈을 받고 물자를 날라주며 돕기도 하였고, 화약과 총포를 팔아서 군수물자를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외국상선으로 오는 물자에만 의존하다보니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또, 청군이 황해에서 일본 상선은 얕잡아보고 공격하여 약탈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일본이 참전하는 이유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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