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1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大韓國 四略)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1

ㅁㄴㅇㄹ(119.196) 2020.09.16 00:15:07조회 0 추천 0 댓글 0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大韓國 四略)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4) 개국독립전쟁(開國獨立戰爭)




1) 개국독립전쟁의 계기




우리나라가 개국(開國)하여 이에 만국(萬國))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며, 이에 여러 나라에서 영사(領事)와 고문(顧問)을 두고 우리나라와 무역하며 통교를 하였다. 개국한 이래로 우리나라가 점차 문물(文物)이 빠르게 발전하고 강성(强盛)하게 되자, 청국(淸國)이 이를 시기하고 우환으로 여겼다.




청국 황제(淸國 皇帝) 주위에 간신(奸臣)이 모여, 간신들이 황제에게 우리나라가 양이(洋夷)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이래 대국(大國)에게 사대지례(事大之禮)를 다하지 않게 되었다고 참언(讒言)하고 모함(謀陷)하였으니, 청국 황제가 매우 어리석어 간언(奸言)을 가까이 하였고 충언(忠言)을 멀리하였다.




청국(淸國)이 우리나라를 번방(番邦)으로 만든 것이 이백년 이상이오. 개국(開國)한 이래로도 사대지례를 폐(廢)하지 않았거늘. 청국이 이 때부터 공물(貢物)을 매우 과도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있는 금(金)·은(銀)과 철(鐵)·석탄(石炭)을 바치라고 하였으며, 청국이 요구하는 공물의 양이 과다하여 광산(鑛山)을 일 년 동안 캐낸 걸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또한 공장(工場)을 세워서 우리나라에서 이제 여러 가지 좋은 물산(物産)이 많이 나게 되었다는 이유로, 비단·무명·종이·도자기·그릇 같은 것도 기선(氣船)으로 실어가야 할 정도로 조공하도록 하였다.




지금 만국(萬國)이 금은으로 무역을 하여 부강하게 되었는데, 금은을 모두 공물로 바치도록 하면 우리나라는 무역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청국이 꾀하는 바가 지극히 뻔하여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이는 청국이 우리나라가 광산을 개발하여 부강(富强)해졌다고 여기고 우리 국력(國力)을 깍아내려 했던 것이다. 또한 공장에서 만든 물산은 모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력(功力)을 들여 만든 것이니, 물산을 조공으로 걷어가려는 것 또한 이 역시 백성들이 모두 분개할 일이었다.




또 우리나라는 청국(淸國)의 번방(番邦)이니 외교(外交)할 국권(國權)이 없는 것이 예(禮)에 맞다고 하여, 외국인을 영사(領事)·고문(顧問)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禁止)하고, 병졸(兵卒)과 전함(戰艦)이 과도하니 줄이도록 하며, 청국(淸國)에서 고문(顧問)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감국(監國) 하겠다 하였으며, 이로서 북양대신(北洋大臣)과 우리 임금님을 동열에 놓겠다 하여 온 백성이 하나같이 격노하였다.




뜻 있는 사람들이 청국(淸國)의 이같은 행태를 보고, 청국은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의 국권(國權)을 빼앗고 끝내는 폐(廢)하여 속군(屬郡)으로 만들 것이오. 청국(淸國) 고문(顧問)을 들이게 되면, 끝내는 순무(巡撫)와 총독(總督)으로 될 것이라 두려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청국이 제 나라의 대신과 우리 임금을 한 열에 놓았으니, 장차 우리 백성이 청국 백성의 종노릇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때, 청국(淸國)에서 어느 간악(奸惡)한 자가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서책을 펴낸 것이 우리나라에 당도하였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흉(凶)하여 민심(民心)이 크게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그 책의 내용이란, 조선국(朝鮮國)이 양이(洋夷)를 등에 엎고 부강(富强)하게 되어 번방(蕃邦)의 분수를 넘었으니 장차 반역(反逆)할 것이 분명히니, 마땅이 먼저 조공(朝貢)을 늘려서 금은(金銀)을 많이 바치도록 하여 그 세력을 깍고, 국력이 쇠해지면 정벌(征伐)하여 조선국(朝鮮國)을 폐(廢)하고 해동성(海東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벌하면 조선의 군민(君民) 가운데 저항하는 무리는 반역하였다 하여 모두 죽이고, 조선국에는 직예(直隷)·산동(山東)의 가난한 백성을 보내서 살게 하며, 본래 살던 조선 사람들은 멀리 서쪽으로 신강(新疆)·북쪽으로 몽고(蒙古)·남쪽으로 운귀(雲貴)의 외진 땅으로 보내면 반역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조선은 항구히 대청(大淸)의 국토(國土)가 되어 장차 근심할 거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으니, 이 서책을 쓴 사람이 지극히 흉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 이런 책략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 책의 내용이 소문으로 돌게 되자, 민심이 크게 흉흉하여 오랑캐가 와서 조선 사람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민간에 많이 나돌게 되었다. 또한 어떤 식자들은 과거 고조선(古朝鮮)이 강성하다 한무제(漢武帝)에게 멸망하였고, 또 뒤에 일어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강성했으나, 수당(隋唐)이 끝이 없이 전쟁해오니 끝내는 버티지 못하고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으며 사람들이 당나라로 많이 끌려갔다는 고사(古事)를 들어서, 지금에 청나라가 한무제(漢武帝)와 당태종(唐太宗)과 같이 하고 있으니, 이번에 군민(君民)이 하나로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진멸되어 조선 사람의 혈통이 하나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지극히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청국 사신(使臣)이 오자 백성들이 사신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려하여 우리 순검(巡檢)이 백성들을 가로막아 사신을 지켜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청국 사신에게 우리나라가 이백년간 조공과 사대의 예를 거스른 적이 없는데, 양이(洋夷)와 친하게 지내고 대국(大國)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금은(金銀)과 물산(物産)을 과도하게 공물로 바치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困窮)해지니 공물은 줄여달라 하였다. 허나 청국 사신은 이전에 조선의 공물이 적었던 것은 조선이 가난했기 때문이고, 이제 조선이 부유해졌으니 공물을 많이 내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또한 병졸(兵卒)과 전함(戰艦)이 없으면 양이(洋夷)·일본(日本)과 싸울 수 없게 되니 이 또한 곤란하다 하였지만, 청국 사신은 청국 군대가 대신하여 지켜줄테니, 조선에서는 무기(武器)와 전함(戰艦)을 사서 군사(軍士)를 기를 필요가 없고, 도둑을 잡을 순검(巡檢)만 있으면 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외교(外交)는 모두 청국(淸國)을 거쳐서 해야 할 것이니 외국 영사(領事)·고문(顧問)도 필요없고, 국왕(國王)을 대신(大臣)과 동렬에 놓는 것은 청국의 예법에 맞는 것이니, 오직 사대지례만 다하라 하였다.




청국 사신이 했다는 말이 신문(新聞)에 나돌게 되어, 많은 백성들이 비분강개하고 원통스러워하였으니, 사신이 돌아갈 때는 많은 사람들이 영빈관을 에워싸고 사신을 내놓으라 하였고, 헌병이 나서서 총을 하늘로 쏘고 나서야 무리가 흩어졌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 마침내 황제가 번방인 조선이 대국을 속이고 양이·일본과 손을 잡았으며, 사신을 욕보였다 하여 트집을 잡아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서양력으로 1894년이었고, 우리나라가 개국(開國)하고 거의 30여년이 지났을 때였다.




청국 황제(淸國 皇帝)가 성지(聖旨)를 내려, 조선왕(朝鮮王)을 폐(廢)하고 해동 땅에는 성(省)을 둘 것이며, 앞으로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이름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군민이 일치하여 원통하게 여기고 청국 황제를 욕하며 분개하였다.




이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마침내, 속국의 멍에를 벗고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하여, 개국독립전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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