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9일 화요일

개척왕 수양 (6) 신주(新州)

[창작] 개척왕 수양 (6) 신주(新州)
ㅁㄴㅇㄹ(222.108) 03-18 22:04:19 조회 540 추천 37 댓글 26

수양대군이 보내진 섬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다들 그 군호에서 따와 수양도(首陽島)라 불렀지만, 행정구역상 조선에서는 새로 얻은 땅이라 하여 신주(新州)라고 불리고 있었다. 혹 남쪽의 신주라 하여 남신주(南新州)라 불리는 일도 있었다.



비록 수양대군은 유배를 온 것이나 다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신주(新州)에서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대군(大君)이라는 권위와 수양대군의 실력은 신주에서는 막강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그 실상은 섬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다스리는 수령에 불과하였지만.





몇년간 수양대군은 하루도 쉬지 않고, 좋아하는 술도 줄이면서, 개척 사업에만 몰두하였다. 철과 나무, 대나무를 모아서 무기와 활과 화살을 제조하도록 하고, 무인들을 데리고 토착민 토벌에 나서고, 포로로 끌고온 토착민은 노비로 만들어 분배하고, 휘하의 백성들이 거주할 집을 세우게 하고, 작물을 재배할 밭을 일구고, 흙과 돌을 가져와서 성벽을 쌓고….



수양대군은 모든 작업에 열정적이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 흙부대를 짊어지고 앞장서기도 하였다. 섬의 주민들은 수양대군의 열정적이고 솔선수범하는 태도에 감복하고 수양대군을 지도자로 따르게 되었으며, 이렇게 수양대군은 조선에서 계속해서 보내져오는 이주민을 토착민과 결합시켜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렇게 처음에는 얼마 안되는 개척민으로 시작하였던 신주 개척지는 여러 개의 고을과 진채로 구성된 정착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고을마다 목책과 성벽을 두르고, 화약무기를 사용하여 주변 토착민 마을을 굴복시켜서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망향포(望鄕浦)라 하여 진(津)을 건설하였다. 조선에서 배로 날라오는 물자와 인력이 도착하는 곳으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거점이었다. 많은 개척민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해안에 나와보고, 조선에서 오는 관리나 선원들에게 애원하였지만, 누구도 허락없이 돌려보낼 수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여 고향을 그리워한다 하여 망향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무튼 수양대군이 이끄는 개척단은 망향포를 시작으로 하여 남서쪽으로 조금씩 확장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면적인 전쟁은 없었으나, 지속적으로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개척민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은 토착민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그 공적을 살펴서 논공행상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했다.



물론 공적을 세운 자들에게 포상은 어쩔 수 없이 대개 토착민에게서 빼앗은 토지와 토착민을 포로로 잡은 노비로 할당되었는데, 이들이 공식적으로 공신(功臣)은 아니었으나 공적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는 것이 그 대우가 조선의 공신과 비슷하여 개척민들은 편의상 이들을 공신이라 하였다.



여러 전투에서 선봉에 앞장 섯으며, 토착민들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에게까지 그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친 홍윤성(洪允成)은 상당한 토지를 얻고 그럴듯한 석성을 쌓아 경음성(鯨飮城)이라 칭하였다. 고래(鯨)처럼 마신다(飮)는 의미로서 술을 좋아하는 홍윤성이 직접 이름 붙인 곳이었다.



한명회는 토착민들의 수원에 독을 푸는 계책을 내어 10여개의 마을을 몰살시킨 공로로, 강가의 경치가 좋은 땅을 택하여 자신의 성(城)을 쌓았다. 이 성은 대나무로 누각을 높이 쌓아 경치를 즐기기에 아주 좋았다. 한명회는 자기 성의 이름을 압구성(狎鷗城)이라 하였다.



"서울 근처에도 이처럼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자주 구경 갔었지. 혹 내가 공을 세우면 장차 그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었건만…."



한명회는 때때로 대나무 누각에 올라 그렇게 술회하였다. 해가 뜨면 백사장이 눈부시게 빛나던 서울 한강의 경치가 떠올랐다.



신숙주는 비교적 안전한 토지를 받고, 이 섬에서 드문 서원을 지어 교육과 서적편찬을 하였다. 하지만 이곳에도 성을 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쌓고 희현성(希賢城)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밖에 권람, 권반 형제의 소한성(所閑城), 이계린, 이계전 형제의 한산성(韓山城) 등의 여러 성이 세워졌다. 물론 명칭은 성이라고 했지만, 그 성들 각각 하나하나는 조선이라면 작은 읍성(邑城)에도 미치지 못할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마을은 수양대군의 신주 치소가 있는 신주성(新州城)이었다. 수양대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지형을 살펴보다가, 수도에 적합한 배산임수형 지형을 찾아보고, 치밀한 전투 계획을 세워 전투를 벌여 그 주변의 토착민을 몰아내거나 복속하고 신주성을 세우게 되었다.



신주성에 성벽을 세우고, 잠저를 세워 터를 닦은 뒤에는 망향포에서 신주성으로 아예 치소를 옮겨오게 됐다. 장기적으로 궁벽한 망향포보다 발전하기 좋은 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차 이곳이 우리 조선의 한양(漢陽)에 못지 않게 번성한 도성(都城)이 될 것이다."



아직 별 볼일 없는 작은 성채였지만, 수양대군은 야심만만하게 중얼거렸다. 신주성을 세우면서 무엇보다 먼저 한 것은 병기고를 세우고 손재주가 있는 이들을 장인(匠人)으로 지정하고 장인에게는 공역(供役)을 할당하여 병장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가져온 병장기를 각자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손질하도록 하고 있었으나, 점차 무기의 부족함을 느껴 보다 체계적으로 무기수급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여러 무기들 가운데서도 무엇보다도 활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조선인은 특기가 궁시(弓矢)이니, 마땅히 이를 갈고 닦아야 한다. 또한 이 섬에는 물소도 살고 있어 흑각(黑角)도 능히 구할 수 있으니, 좋은 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궁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수우각(水牛角)이나 전죽(箭竹)을 채집하여 활과 화살을 생산하고 궁술을 훈련시키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은 성주(城主)들을 불러모아 화살촉을 잔뜩 바닥에 늘어놓고는 들어보이면서 선언하였다.



"내 이 화살촉을 팔방통화(八方通貨)라 이름을 지었네. 앞으로 신주땅에서는 이 화살촉을 화폐(貨幣)로서 쓸 것이오."

"……."



그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황당한 소리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신주가 오지라고는 하지만 전폐(箭幣)를 공식 화폐로 쓰겠다니. 하지만 수양대군의 주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 팔방통화는 평상시에는 화폐로서 쓰도록 하고,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쓸 수 있으니 매우 유용할 것이오."



이 정도로 수양대군은 신주 개척에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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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지만 대만이 아닌 그 무언가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지명에 매우 고민했습니다.

결국 신라 한산주의 초기 지명을 따라서 신주(新州)로 해버렸음. (※) 행정구역상 신주 / 통칭 수양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5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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