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4일 월요일

중립한국 제4화) '군수물자'와 '민수물자'

 중립한국 제4화) '군수물자'와 '민수물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여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미국까지 침략하여 전쟁은 더욱 커졌다.

우리 한국은 두 전쟁에서 모두 중립을 선언하였다.


비록 중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정세도 여러모로 심상치 않았다.


일본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의 대의에 따라야 한다는

친일단체들이 국내에도 여럿 조직되어서

'대동아운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에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세계최강이라는 영국 해군까지 격파하며,

인도지나반도로 진군하자 국내에서도

'대동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물론 대동아운동에 반대하며

정부의 시책인 '중립평화'를 지지하는

지식인과 정치인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는 국론이 매우 크게

분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와는 별개로

민간에서는 생활고가 더 큰 염려였다.


전쟁 때문에 무역항로의 안전이 불안해지면서,

식량과 석유를 비롯한 여러 제품의 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결국 정부에서는 군수와 주요 산업에

우선적으로 석유를 공급한다는

석유통제령을 내리게 되었고,

물가폭등을 막으려고 가격제한도 실시되었다.


석유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번화하던 부산 거리에서도

자동차를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인력거, 자전거,

심지어 우마차까지 나와서

제 세상을 만난듯 활발히

도시의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흡사 과거로 돌아간 듯한 풍경 때문에

덕분에 길거리 공기는 꽤나 깨끗해졌지만,

이번에는 우마(牛馬)의 분뇨가 골치거리였다.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전체적인 생활이

마치 십년 이상 과거로 돌아간 듯 하였다.


하지만, 얼마전 일본 본토에 다녀왔다는

야마무라 군의 이야기에 따르면,

완전히 전시태세가 되버린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이 훨씬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금 사회 전체에

단단히 군기(軍氣)가 잡혀서

모든 물자가 통제되는 것은 물론이며,

전선에 나선 군인(軍人)을 존경하는 뜻에서,

사회 전체가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사적인 유흥조차 금압하고 있다고 한다.


술을 마시거나 파티도 열지 않고,

화려한 옷도 입지 않고,

유행가 대신 군가(軍家)를 부르며,

전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시생활 이야기를 듣고, 과연

무사도(武士道)를 숭상하는 나라 답다고

경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는 이전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경은 우리나라보다 번화하고,

놀거리 볼거리가 많다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우리나라가

놀거리가 더 많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가 평화중립을 하여

그렇게 엄격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어쩐지 모를 안도감도 들고 있었다.


'일인 거류지'도 나름대로

전쟁 분위기에 엄숙한 분위기였다.


'전승기원(戰勝祈願)'이라고 써진 현수막이 나부끼고,

'욱일기(旭日旗)'를 곳곳에 걸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생활상은 전쟁 전과 다르지 않았는데,

일본 본토는 완전히 전쟁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본국에서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무심코 영어를 한 마디 썻는데,

당장 옆자리 에서 '어째서 적국어(敵國語)를 쓰는가!'하고

호통을 치면서 내 머리를 때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스미마셍'을 연발해야 했지."


야마무라 군은 뒷통수를 쓰다듬으면서

쑥쓰러운 듯이 이야기 하였다.


"거류지에서도 궁성요배나 승전기도를 올리고 있지만,

매일이 수도 생활 같은 본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우리 거류민들도 정신무장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


야마무라 군은 본토에서

난데없이 뒷통수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적국어'를 썻던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 여겨서

오히려 자신과 같은 거류민들이

전쟁에 대비하는 정신무장이

부족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일본인 거류지에서도 거류민 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대동아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거류지는 일본 정부의 행정력이

직접적으로 행사되지 않다보니

'전쟁국'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중립국'의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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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 부족으로 일상생활은 힘들어졌으나,

반면에 동래의 부산항은 정말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무역상인 야마무라 군의 집안이나

우리 숙부님 회사의 일거리도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를

우리 한국에서 수입해가고 있었다.


부산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철도를 타고,

많은 화물이 끝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특히 대일본 수출이 급증하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나라는

'중립평화' 칙명(勅命)에 따르고 있어서

'군사물자'의 수출은 금지하고 있었다.


칙명은 곧 국법(國法)과 같은 바,

형법(刑法)으로 벌하게 되어 있다.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나

대외무역을 정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민수물자'의 수출만이 허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출이 금지된 군사물자는

직접적으로 무기로 쓰일 수 있는

총포와 화약류 정도로 되어 있었다.


부산과 목포 항구에서는

매일같이 산처럼 쌓인 '민수물자',

곡물과 포목, 그리고 철강과 석탄을

일본 화물선이 싣고서 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민수물자' 들도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쟁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곡물은 일본군의 군량미가 되며,

포목은 일본 군인의 군복이 되고,

철강과 석탄은 일본 군수공장에서

무기제조에 쓰이고 있다는 것은

'병신과 머저리'가 아니라면

전부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전쟁이란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는 것이라,

이 같은 '민수물자'의 수출 때문에

우리나라가 대일본 무역에서

개항 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는

경제신문의 기사까지 나오고 있었다.


또 신문을 보면, 일본 외교관들은

수출량과 품목을 좀 더 늘려줄 것을 요구하며

'민수물자'의 범주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본래,

중립정책과 군수물자 수출금지 정책은

일본이 남경의 장개석 정부를 공격하자

우리 한국이 이에 중립을 표방하고,

일본이 이를 승락하긴 하였으나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장개석의 국민군에

군수물자를 수출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이는 훨씬 과거에

열하성의 장학량군(張學良軍)과

산서성의 염석산군(閻錫山軍) 측에다

돈을 받고 수출했던 무기가

중국의 여러 군벌이 합동하며

국민군에서도 쓰게 된 것으로 해명되었으나,

일본이 한국이 중일 간에서 중립을 지킬 것이라면

중국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수출해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요구한 것을 우리 정부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일본에는

군사물자까지 수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지금 전쟁중이라

물자 확보에 시급하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지만,

해가 지나면 입장을 뒤집는 외교관의 말투에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에서도 대일본 수출로

많은 돈을 버는 상업가(商業家)가 많았기 때문에,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정부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워

중석(重石, 텅스텐)과 시멘트의

대일 수출을 추가로 허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출 확대에

미국 대사와 중국 대사가 정부에 항의하였다고 한다.


일본과 전쟁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물자를 수출하는 것이

영 마땅치 않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에

물자를 수출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이

바닷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일본과 동맹국으로

독일과 전쟁하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에는

식량 등 물자수출을 계속 하고 있으며,

일본도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다만, 대일본 수출과 비교하면

대소련 수출은 미비한 양이었다.


미국이 '랜드리스'란 명목으로 많은 물자를

소련에 거의 공짜로 빌려주고 있어,

우리 상품이 수출될 시장이 별로 없다는 사정이 있었다.


우리 정부의 관료들은 이렇게 해명하였고,

미국과 중국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뒤로는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 대외 수출 물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국내에서 물가가 오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수출량을 제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무라 군의 이야기를 들으면

전시체제 하의 일본 보다는 우리 한국이 살기 좋다고 하였다.

일본의 민간 물자는 정말로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대미개전을 하고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면서,

장정이란 장정은 전부 전쟁터에 나갔으며,

공장은 군수물자를 우선적으로 생산하게 되었기 때문에,

특히 민간 잡화 종류가 많이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많은 물자를 수입해가고 있었으며,

물자의 수입량 만이 아니라 종류도 늘어나고 있었다.


야마무라 군의 무역회사는 본래 곡물 거래를 주로 하였으나,

점점 각종 잡화(雜貨)를 수입하기도 하고 있었다.


"설탕 공급 정지로 사탕도 생산 중지됐다고 해.

그래서 한국 사탕을 싸가지고 가서 거래처 사장 집안의

아이들에게 나눠주니 아주 좋아하더군."


"그럼, 사탕 장사를 해보는건 어떻겠는가?"


"하하. 가방에 싸서 숨겨가는 거라면 몰라도,

대량 수출하려고 하면 세관에서 몰수될거야.

하지만, 선물용으로는 쓸모가 많겠지.

또 술이나 담배도 선물로 주면 아주 기뻐해.

생산량이 많이 줄고 판매도 통제된다고 하더군."


사탕 만이 아니라 술, 담배 같은

기호품도 인기가 매우 많다고 하였다.

옷이나 신발 같은 것도

일본으로 많이 팔려나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우리 국산 잡화(雜貨)는 품질이

일본제(日本製)보다 낮은 편이었고,

영미제(英美製)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내수(內需)만을 충당하고 있었으며,

산업역량을 개발하고자 외제보다 국산품을 쓰자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하기도 하였다.


몇년 전에 까지는 여러 제국에서

서로 자국 시장을 보호한다고

관세(關稅)까지 올리는 경쟁이 일어나

그 때는 정말 수출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도 부족한 생활물자를

우리나라에서 수입하여 보충하려고

관세를 크게 낮추고 있다고 하였다.




생활물자는 이렇게 부족하였으나,

중국(中國)과 인도지나(印度支那)에서의 싸움은 

일본군이 연일 엄청난 전과를 거두며 연승하고 있었다.


인도지나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일본에 차례차례 패퇴하고 있었으며,

신문 지도에서 보이는 일본군의 점령지는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었다.


야마무라 군의 이야기에 따르면,

본국에서도 생활물자가 부족해졌음에도

황군(皇軍)의 연승 소식을 보고 기뻐하며,

누구도 불평을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황군(皇軍)의 활약을 지원하여

대동아 해방에 나서고 있다는 것에

국민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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