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4일 월요일

대한국 사략(大韓國 史略)

대한국 사략(大韓國 史略)


우리 대한(大韓)의 상고(上古) 역사(歷史)를 이야기 하자면, 단군성제(檀君聖帝)가 고조선(古朝鮮)을 건국(建國)하였으니, 이 때가 서기전 2333년이다. 고조선이 한(漢) 무제(武帝)에게 멸망하고, 삼한(三韓)이 병립하였다. 삼한(三韓)은 곧 진한(辰韓), 변한(弁韓), 마한(馬韓)이니, 이는 곧 후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삼국이다.

삼한이 신라에게 대일통(大一統)되었으나, 신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갈라져 후삼국(後三國)이 되었다. 후삼국을 왕씨(王氏)가 세운 전조(前朝)가 재일통(再一統) 하게 되었으니, 이 때 국명(國名)을 고려(高麗)라 하였다.




- 전조(前朝) 고려(高麗)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국왕들은 불교(佛敎)를 과도하게 숭상하였으며 사치스럽고 혼미하였으니, 마침내 무신(武臣, 오늘날의 군인軍人)이 국권을 빼앗아 국왕을 함부로 죽이고 바꾸어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百性)들이 곤궁하게 되었다.

무신(武臣)들이 서로 권세를 다투다, 마침내 최충헌(崔忠獻)이 무신(武臣)으로 권세를 잡고, 최씨(崔氏) 4대(代)에 걸쳐 집권 하였는데, 내란(內亂)과 외침(外侵)이 끊이지 않았다.

무신집권을 끝내고자 왕이 몽고(蒙古)에 입조·굴복하였으나, 이후로 왕씨 국왕은 몽고 황실에 머물며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가 도적(盜敵)과 왜구(倭寇)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략]

- 본조(本朝) 건국(建國)
우리 태조(太祖)는 본래 동북면(東北面, 지금의 함경도)에서 우리 민족을 이끌던 장군(將軍)이었다. 동북면은 몽고에 굴복하며 매국노가 팔아넘긴 땅이었으나, 우리 태조가 공민왕(恭愍王)에 귀부하면서 그 땅을 다시 찾아왔고, 공민왕이 기뻐하며 우리 태조를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치세에 우리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침범하는 몽고·왜구 같은 외적(外敵)들을 남김없이 물리쳤으니, 이 때에 나라를 보전한 공적이 모두 우리 태조에게 있었다. 공민왕은 그 비(妃)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자, 정신이 혼미하여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총애하였다.

마침내 공민왕이 홍륜(洪倫)에게 시해(弑害) 되자, 부원배(附元輩)들이 신돈의 아들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 속여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중국(中國)을 치려 하였으나, 우리 태조가 나라의 국운(國運)이 어려운데 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겨, 압룩강에서 회군하여 돌아와 신우(辛禑)를 폐(廢)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올렸다.

우리 태조가 왕위에 올린 공양왕(恭讓王)이 우매(愚昧)하여, 태조의 병환을 틈타서 정몽주(鄭夢周)를 시켜 우리 태조를 모해(謀害)하려 하였다. 이에 우리 태종이 정몽주를 제거하여, 태조를 위험에서 구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컷다.

공양왕이 왕위를 내려놓고 우리 태조에게 양위하였고, 본조(本朝)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 뒤에 태조 고황제(高皇帝)라 높이 추존하였다.

우리 태조가 늙고 혼미하자, 정도전(鄭道傳)이 어린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세우고 왕자들을 죽여 권세를 얻으려 하였다. 이에 우리 태종이 간신(奸臣) 정도전을 제거하여 본조의 기틀을 세웠다.

정도전을 제거하고 적장(嫡長)이신 정종(定宗)이 왕위에 올랐다. 정종께서는 아우인 태종이 나라를 세우는데 공(功)이 크다 하여 왕위를 양보하였다. 제국이 선 뒤에 두 분을 정종 의황제(義皇帝), 태종 무황제(武皇帝)로 추존하엿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 세자(世子)가 난행(亂行)을 저지르자, 세자를 폐(廢)하여 양녕대군으로 삼고, 현량(賢良)하신 충녕대군을 왕으로 올렸으니, 이 분이 세종 문황제(文皇帝)이시다. 헌데, 이는 실은 양녕대군이 세종 문황제께서 현명한 걸 알고 왕위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난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한다.

과연 세종 문황제 폐하께서는 현명하시어, 국토(國土)를 두만강까지 넓히시고, 과학에 능통하시어 혼천의, 자격루, 양부일구와 측우기를 만드셧고, 정음(正音)을 창제하여 백성이 문자(文字)를 쓸 수 있게 하시었다. 또 지극히 인자하시어 가난한 백성과 병신(病身)과 노인(老人)을 두루 보살피셧으니, 세종 문황제 폐하의 업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세종 문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세자(世子) 문종(文宗)께서 왕위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재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셧다. 오늘날 이분을 문종 도황제(悼皇帝)로 추존하였다.

문종 도황제께서 승하하시자, 세자(世子) 단종(端宗)께서 왕위에 오르셧는데, 오늘날 이분을 추존하여 단종 애황제(哀皇帝)라 한다. 이 때에 김종서, 황보인 등의 원로대신들과 종친 안평대군이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하며 국사를 어지럽혔다.

이에 세종 문황제 폐하의 아들이며, 문종 도황제 폐하의 아우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정사를 바로 잡았다. 이분이 바로 세조 강황제(康皇帝) 폐하이시다.


- 황제 추존표 -
태조 고황제(高皇帝)
정종 의황제(義皇帝)
태종 무황제(武皇帝)
세종 문황제(文皇帝)
문종 도황제(悼皇帝)
단종 애황제(哀皇帝)
세조 강황제(康皇帝)

[중략]

연산양려왕(燕山煬厲王)은 과거 연산군(燕山君)이라 하였는데, 모든 역대 임금님을 제(帝)로 추존하면서 왕(王)으로 하였다. 연산왕은 재위하는 도중에 폭정(暴政)하였는데, 음탕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좋은 신하들을 함부로 죽였다.

그래서 왕위를 올리되 시호를 양(煬), 려(厲)라 하였는데, 양(煬)은 하늘을 위반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음란하여 정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며, 려(厲)는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뜻이다. 연산왕이 패역무도(悖逆無道)한 것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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