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8일 금요일

중립한국) 대한국 사략(大韓國 四略) 근사요강(近史要講)

ㅁㄴㅇㄹ(119.196) 2020.08.28 21:35:19조회 0 추천 0 댓글 0







(1) 서문



필자(筆者)가 근래 젊은 청년들과 만나본 바, 우리나라 대한제국(大韓帝國)이 개국(開國)하게 된 전말(前末)를 잘 알지 못하고, 무수하게 많은 선열의 노력과 희생이 있어서 오늘날의 번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방탕한 쾌락에 젖어 사는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허나,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어려운 글 읽기를 싫어하고 허황방탕한 소설(小說)에만 빠져사는 것이 안타까운데, 그리하여 필자는 이 개국사략(開國史略)을 이야기 책과 같이 간략하고 알기 쉽게 지었다.



젊은 제군들이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대한국 개국사(大韓國 開國史)를 소략하게나마 숙지하기를 바라는 바, 이에 흥미를 가지는 젊은 제군들은 상세한 서적을 보고 역사의식을 가지기를 바라노라.









(2)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폐하(陛下)의 어린 시절



선황제이신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폐하(陛下)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철종 장황제 폐하에게 소생이 없어,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전하(展下)를 생부(生父)로 두신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폐하(陛下)가 뒤를 이으시어 보위에 오르시었다.



고종 태황제 폐하는 지극히 영명하신 분으로, 어린 나이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낱낱이 숙달하였으며,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책을 널리 독서(讀書)하시어 이분이 바로 신동(神童)이라 소문이 자자하였다.



폐하는 인덕(仁德)이 있으신 분이라, 어린 나이에도 언행(言行)이 일절 예의(禮義)에 어긋남이 하나도 없었고, 사가(私家)에 게실 적에는 우리나라 백성들이 가난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하시었다.



이 때에 일화로, 고종 태황제 폐하가 사가에 게실 적에, 늘 아이들과 같이 놀 때 군밤을 달라 하여도 주지 않은 군밤장수가 있었다. 폐하가 보위에 오르시고 군밤장수가 궁궐에 불려갔는데, 군밤장수는 군밤을 주지 않은 것을 원망(怨望)하여 인심(人心)이 나쁘다고 벌(罰)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 떨었다고 한다.



허나 폐하는 돈도 주지 않고 군밤을 달라 하였음이 미안하다 하여, 군밤값을 내려주며 군밤을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라 하였으니, 폐하가 인덕(仁德)이 있으심이 이와 같았고, 백성들이 현군(賢君)이라 칭송하였다.







(3)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전하(展下)의 섭정기(攝政期)



폐하가 보위에 오르셨을 때 나이가 아직 어리시어, 생부(生父)이신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당시에는 대원군 합하)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대원왕은 잡다한 서원을 철폐하고, 탐관오리를 많이 주벌하였으며,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둬 군역(軍役)에 불공평함이 없게 하였다.



허나 대원왕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려 하자, 공사(工事)에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대원왕은 당백전을 제조하여 경복궁 비용으로 충당하려 하였다. 이 때, 고종 태황제 폐하께서 대원왕을 불러 경복궁 중건을 중지하라 하시며 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우리나라의 천하명당(天下名堂)이며, 가장 큰 궁궐이나, 지금 예제(禮制)로 따지면 작은 제후왕부(諸侯王府)이며, 이렇게 작은 궁궐을 중건(重建)하는데 명당과 나라의 큰 돈을 쓰는 것은 아깝습니다."



이에 대원왕이 태황제 폐하가 내심을 큰 뜻을 품고 있다는걸 알고,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고 고궁지(古宮地)로 남겨두었다.



고종 폐하 재위 3년인 병인년(서양력 1866년)에 천주교(天主敎) 신부(神父)에게 중재(仲裁)하게 하여, 법란서국(法蘭西國)과 개항조약(開港組約)을 맺었으며, 이어서 미리견국(美利堅國), 영길리국(英吉利國)과 조약을 맺어 개항하였다.



개항을 하고 서양 여러 나라에서 군사와 과학·기술에 능통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고문(顧問)으로 두었다. 총포(銃砲)를 사오고 외국(外國) 군인(軍人)을 교관(敎官)으로 두어 신식군(新式軍)을 만들고, 화륜선(火輪船)을 사와서 조운선(漕運船)으로 쓰게 하였다.



여러 광산(鑛山)을 캐도록 하였는데, 금은(金銀)보다 탄광(炭鑛)을 세워 석탄(石炭)을 캐는 것을 중시하였으니, 폐하께서는 "금은은 그저 사치하는 물건이지만 석탄은 백성들이 겨울에 따듯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땔감이기 때문이다."라 하시어, 대원왕이 이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서양에서 측량(測量)하는 기술을 배우게 하여, 전국(全國)의 전답(田畓)을 모두 양전(量田)하도록 하였으며, 앞으로는 전세(田稅)를 전답의 넓이에 따라서 과세(課稅)토록 하고, 소작료(小作料)에 한도(限度)를 정하였다.



이렇게 대원왕이 섭정을 하다가 폐하가 성년에 이르시자, 폐하가 몸소 친정하시기로 하시었다. 그리하여, 대원왕이 섭정을 그만두고 운형궁(雲峴宮)에 물러가서 양로(養老)하시었다.



이 때에 정치가 청정(淸靜)하였으며, 국고(國庫)가 가득하고, 지방에도 관아마다 양곡(糧穀)이 가득하였으니, 백성들이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와서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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