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일요일

빙성계 단편) 귀향

[창작] 빙성계 단편) 귀향
ㅁㄴㅇㄹ(14.52) 04-21 15:00:56 조회 506 추천 36 댓글 9





- 모월 모일, 북방을 순시하던 상이 함흥에 행차하였다. <실록>





'이백년이 지났는데 동북면 고향땅은 바뀐게 거의 없구나.'

후손의 몸으로 전생하여 살아난 태조는 육신의 눈으로는 함경도의 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영혼의 눈은 2백년전 동북면을 보고 있었다.

'동북면 가별초들… 방원이가 다 해체 시켜서 양민으로 만들었지. 조사의를 따라서 반란 일으켰다고 해도 결국 죄다 내 명령이니까 죽이지는 말라고 했는데… 들어주긴 들어줬지만….'

반적은 남김없이 몰살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왕조국가의 원칙이지만, 이성계의 사주를 받고 일어난 조사의의 난에서는 동북면으로 도주한 패잔병은 색출없이 살아남았다.

이성계가 개입한 반란이라 가담자가 너무 많아 색출하면 동북면의 인심이 어지러워져 제2의 반란이 일어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은 주도한 가별초 조직은 해체되었고, 이때부터 동북면은 조정의 경계를 받게 되었다.

북방으로 사민된 사람들도 많겠지만, 함흥이라면 그래도 당시 동북면 가별초의 직계 후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보이는 얼굴도 있었으니까. 아마 전조 말기에 홍건,왜구,요동정벌에서도 함께 싸웠던 전사들의 후손일 것이다.

'이자식들… 어쩌다가 전부다 이렇게 됐나…. 기운이 하나도 없구나.'

하지만 동북면의 백성들과 함경도의 백성들은 달랐다. 고향 산천은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패기(覇氣)가 없었다.

한양에서 올라오는 행차를 보고 주눅들어서 어깨가 축 쳐진 채로 넙죽넙죽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백년전 동북면의 백성들은 달랐다. 원나라 치하라고는 하지만, 이주한 고려인과 여진족의 무력충돌이 적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낸 동북면의 고려인들은 개척지 특유의 강인한 기풍이 있었다.

'영길도, 영안도, 함길도, 함경도. 동북면이라 하면 될 것을 땅 이름을 뭐하러 이리 자주 바꾸었느냐.'

하지만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함경도에서 일어난 수차례의 반란과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이주정책. 나라 전체에서 죄인(罪人) 취급을 받은 조선의 함경도 백성들은 조정을 보기만해도 이번에는 무슨 짓을 시킬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노예체질로 전락하였다.

'동북면 사람들이 어쩌다 이렇게 기운 없어지게 되었나. 이래서 내 묘를 고향에 만들라 했는데. 방원이 이 고얀 녀석.'

이성계가 죽기 전에 한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동북면 백성들 이었다. 자신과 함께 싸워서 조선왕조 개창의 기틀이 된 백성들이 고려 귀족의 후예들에게 도리어 반역향으로 멸시받게 되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굳이 자신의 묘지를 고향 동북면으로 하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렇 게하면 후대의 임금들이 개국군주의 묘지가 있는 땅에 한 번은 찾아오게 될터.

임금의 행차는 백성들에게 고달픔이기도 하지만 기회가 될수도 있었다. 임금은 백성을 어버이처럼 보살필 의무가있기 때문이다.

동북면의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고,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문무과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며, 동북면의 풍광을 보고, 조선개국의 정신을 되새기며 호연지기를 기르기를 바라고 내린 유명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면 이렇게 도야지 같은 몸이 되겠느냐!
무학대사더러 도야지라고 농담 한 번 했더니
내가 인과응보를 받는구나!'

이성계는 말타고 가는 것도 체력이 부족해서 힘겨운 후손의 몸을 한탄했다. 자신이 죽기 얼마전에도 이 몸보다는 체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

함흥본궁.

과거 시험을 본다는 소식에 본궁에 모여든
선비와 양민들을 앞에 두고,
이성계는 일장훈시를 하였다.

"이 나라는 누가 세웠느냐?!
"태조 전하 이옵니다. 전하."
"그렇다. 태조 전하 이시다."

본궁의 전각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어진이 오늘 따라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임금의 등뒤로 높이 세워놓고 있었다.

전성기 장년 시절을 묘사하여 당당한 체격의 본궁 태조어진과는 달리 금상은 신체가 그리 강건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후손인지 얼굴은 무척 닮았고, 무엇보다도 그 패기가 실로 태조의 환생인듯 하다고 다들 수근 거렸다.

"태조 전하가 어디에서 용사와 강병을 얻었느냐?
바로 이 동북면. 함경도 땅이다.
너희 조상들이 바로 태조 전하와 함께
야인 도적들, 왜구 놈들, 중국 홍건적 놈들,
이땅에 쳐들어오는 모든 외적놈들.
동서남북 다 돌아다니면서,
싸그리 죄다 물리치고, 또 요동까지 갔다오고,
개경의 썩은놈들, 요승 신돈놈의 종자까지
들어엎고 만든게 이 나라 조선이 아니냐!"

훈시에서 제일 나오는 진심어린 뜨거운 열기가 메마른 장작같은 백성들의 마음에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말에 어긋남이 있는가?!"

그저 함경도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불이익을 받고 천시, 무시되던 그들에게 임금이 와서 조선은 너희 조상들이 만든 나라라고 선포 해주다니.

"맞습니다. 맞습니다!"
"백번천번 맞는 말이옵니다!"

함경도 백성들은 감격하여 환호하였다.

"그런데 지금 왜구놈들이 쳐들어올거라 한다."

그러다가 임금의 갑작스러운 충격선언에 싹 조용해졌다. 남도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적지 않았지만 아직 북쪽에는 퍼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 너희 북도 군사들 말고 팔도에 믿을만한 군사를 찾기 어렵다.
왜적이 쳐들어올게 뻔한데도 남도 놈들은 성을 세우라고 해도 못하겠다고 게으름을 피워!
심지어 어떤 놈은 우리동네 앞에 개울이 있으니 왜적이 건너오지 못하니 괜찮다고 상소를 쓰더라!
아니, 어떻게 먼 바다를 배를 타고올 왜적이 동네 개울은 건너지 못하는고? 이거 광대패보다 웃기는 놈들이 아니냐? 웃어줘라!"

"하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임금의 명령이니 어찌 웃지 않을수 있겠는가.
북도 사람들은 남도 샌님들의 어리석음에 마음껏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니 내가 북도에서 용사와 강병을 구하게 되었다. 오늘 문무과, 갑사를 뽑겠다. 오늘 뽑힌 인재는 전쟁에 나가게 될테니, 겁나는 겁쟁이는 지금 미리 저으기 압룩강 넘어가서 명나라에 엎드리고 살거나, 두만강 넘어가서 야인들하고 말이나 기르고 살아라."

임금이 한손을 휘저으며 말하였지만 감히 도망칠 자는 없었다.

"싸워라! 용감하게 싸워서 남도 놈들이 벌벌 떨고 있을때 왜군 놈들의 목을 따버려라! 두 번 다시 남도 놈들이 북도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거라!"

일장훈시가 끝나자 본궁 마당이 숙연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각오를 하라는 과거였으니 당연하다.

그렇게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문무양과가 실행되었다.

그리고 이성계의 눈에 유독 들어오는 한 인재가 있었다.

"이름이 무었이냐?"
"경성(鏡城) 사람 이붕수(李鵬壽)입니다! 전하!"
"이름 좋다! 네가 장원이다!"

- 함흥에서 백성들을 모아 '함경도는 국본(國本)의 땅'이라 하시며, 본궁(本宮)에서 무과(武科)를 열었다. 장원급제 이붕수 외 급제자.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 등...<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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