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9일 월요일

중립한국) 1941년 진주만

중립한국) 1941년 진주만
ㅁㄴㅇㄹ(118.218) 2020.06.29 12:34:38조회 0 추천 0 댓글 0



그 날은 쌀쌀하고 추운 날씨였다.



'나'는 아침부터 친우이자

사업상 파트너인 야마무라 군과 만나려고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로 들어갔다.





'나'는 미곡상(米穀商)인 숙부의 상회(商會)에서 일하고 있으며,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은 우리 상회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야마무라 군 역시 무역상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나다가 친구가 된 사이였다.



한일양국간 조약에 따라 개항지에 설치된 일본인 거류지는

부산, 울산, 마산, 원산, 목포, 인천 등 전국 11개소에 있다.



그 가운데 바다 건너 대마도와 마주보고 있는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가 가장 번창하였다.



일본식 목조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며,

거리에는 일식 요리점이 많이 있었다.



옷차림도 화복(和服)을 입은 남자나

기모노(着物)를 입은 여자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거리 중앙에는 붉게 칠해진 도리이(鳥居) 문과
신사(神社)까지 세워져 있었다.



거류지 경계를 넘으면 그야말로 이국적이라

우리 한국의 평범한 길거리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본국에 다녀온 야마무라 군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히려 거류지 쪽이 더 '화풍(和風)', 이른바

'일본다운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동경에서는 양복(洋服)이 유행하게 되어서

이전처럼 화복(和服)을 입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거류지에서는 화복(和服)을 오히려 꿋꿋하게 입고 다닌다던가.



"오히려 이국(異國)에 와있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민족성'을 강조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것이 야마무라 군의 견해였다.



하긴, 나는 중국인 거류지,

이른바 '차이나 타운'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본국인 중화민국에서는

이미 청복, 변발, 전족이 폐지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거류지에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마치 '만청(滿淸) 시절' 같은 느낌이라든가.



이래서는 나도 앞으로 거류지에 들어올때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신사 앞을 지날 때, 여러 일인들이 신사 마당에

빼곡하게 모여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 사이에 야마무라 군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 보았더니,

일장기와 어진영을 걸어놓은 것이 보였다.

이른바, 궁성요배(宮城遥拝)라고 하는 예식이었다.



'그러고보니 궁성요배를 하는 시간이었군.'



궁성요배란 일인들이 그들의 군주인

천황(天皇)이 있는 황거(皇居)를 향하여

정기적으로 인사를 올리는 예식이었다.



국기인 일장기와 천황의 어진영을 걸어놓고,

느릿느릿한 박자로 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모습이 제법 엄숙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 일인 족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성요배에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엄숙한 국가 예식을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묵묵히 신사 밖에서 보고 있었다.



"박 군. 왔는가?"



궁성요배가 끝나자 야마무라 군이 나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하였다.

나는 야마무라 군과 함께 다점(茶店)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풍(洋風)으로 꾸며진 다점에 도착하자

다점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 배려하여

부산과 맞은편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라디오 전파를 강하게 쏘아주기 때문에

부산에서는 일본 라디오를

공공연하게 청취할 수 있었다.



한가하게 대화하던

나와 야마무라 군의 대화는

어느새 국제정세로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의 국제정세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탓이었다.



"지금 동양에서 우리 일본과 한국,

우리 두 나라만이 제대로 된 독립국이라 할 수 있지.

영미(英美)의 백인종(白人種)들은

우리 황인종(黃人種)을 멸시하고 있어.

그러니까 석유금수로 고사시키려는 거야."



"미국은 황군(皇軍)이 중국(中國)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서?



"지나(支那)는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야.

지난 수십년간 지나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

장개석(蔣介石)이란 자도 따지고보면 결국

군벌(軍閥)의 하나일 뿐이 아닌가?

황군(皇軍)이 질서를 바로잡는건 당연한 '개입'이야.

박군은 하북출병(河北出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북출병이라. 하하."



하북출병은 일본에서 한국에 극비리에 제안했다고 알려진 계획이었다.



한국이 중국의 하북에 출병하여 중국을 남북에서 완전히 제압하고,

일본은 남중국을, 한국은 북중국을 점령하여 분할하자는 계획안이었다.



이 계획이 신문에서 보도되자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우리 일한양국의 출병으로

중국의 질서가 바로잡히면 아무래도

일한양국에 모두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정부의 당국자들이 현명하게 판단하겠지."



"정부에만 맡겨둘 수는 없어. 나약한 정치가들이

어리석은 '외교적 판단'을 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민간에서 정부에 강하게 압력을 보여줘야 해."



하지만 현재 정부에서는 출병 계획은 없는 듯 하였다.



'나' 개인으로서는 솔직히 출병론은 달갑지 않았다.



강경한 매파 군국주의자를 자처하는 야마무라 군 앞에서

입으로 내뱉으면 나약하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친척들 사이에서는 전쟁으로 사상(死傷)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외조부는 청나라와 싸웠던 '독립전쟁'에 나섯다가

엉덩이에 총을 맞아서 아직도 다리를 절고 있으며,

우리 집안의 장손이었다는 큰아버지는 군 장교로 입대하여

저번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로 출병(出兵)한 '십만용사'였으나

저 머나먼 구주 땅 어딘가에서 고혼이 되어 시신조차 찾지 못하였다.

또 삼촌 친구 가운데는 러시아로 출병하였다가 러시아에서 '혁명'이 나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가까스로 돌아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독립(獨立)을 하고 고토(古土)를 되찾는다는건 그렇다 치자.

억만리 너머 천하의 정반대에 있는 남의 나라 전쟁질에 끼어들게 무엇인가?

개화니 국제정세니 뭐니. 내가 젊은 시절에는 그런거 없어도 농사짓고 잘 살았다.

옛날 성현들이 병기(兵器)는 흉(凶)하다 했는데, 요즘 들어서야 그 말의 참뜻을 알겠다.

정부가 이렇게 전쟁질에 나서면 온 동네에 멀쩡한 집안이 남아나지 않겠다."



지금 시대에 고루한 유림(儒林)인 우리 집안의 당숙 어르신은

친족들이 전쟁으로 많이 사상하였다고 크게 상심하여,

때 아닌 만인소(萬人疏) 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서울의 개화 지식을 배운 사람들에게도

당숙 어르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듯 했다.

신문을 보다보면 호전론(好戰論)과 평화론(平和論)

가운데서는 평화론이 앞선 느낌이었다.



하지만 일본 라디오를 들으면 호전론이 강하게 느껴졌다.

연일 귀축영미(鬼畜英美)를 타도하자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소위 '선비의 나라'라는 우리나라와

'무사의 나라'라는 저 나라의 국민성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야마무라 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라디오가 지직거리며 노래에서 뉴스로 바뀌었다.

정기뉴스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뉴스에서 경악할만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연합함대를 이끌고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 하였으며,

미국 함대를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전쟁, 또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유럽과 중국에서의 전쟁이 아니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바, 박군! 이, 이거 들었는가?

우리 제국해군의 연합함대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였다고 하는군!"

"그래. 들었네. 하와이를 기습하다니. 정말… 대담한 작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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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다방에서 나와자 일본인 거류지의 길거리는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흔들며 반자이(만세)를 부르는 일본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일본인들이 마쓰리(축제)를 하는 날도 이런 지경은 아닐 정도로 열렬하게 환호하고 있었다.



나는 "쓰미마셍"을 외치면서 어렵게 환호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거류지 밖에서는 경찰들이 일본인 거리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봐. 무슨 일이야? 왜놈들이 왜 저러는 거야?"



경찰들은 일본인들이 무슨 소요사태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의혹을 가지고 있었는 듯 하였다.

한 경찰관이 겨우겨우 환호하는 일본인 무리를 빠져나온 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일본 함대가 미국 하와이를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는군요."

"뭐? 그,그게 정말인가? 저 왜놈들이 미국을 이겼다고?"

"지금 일본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경찰은 놀라워하고 있었다.



미일관계가 하루하루 악화되어 가면서

만일 이러다가 급기야 전쟁이 터진다면

일본이 이기겠는가? 미국이 이기겠는가?



이 주제를 놓고 하는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문, 라디오에서 열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여론은 대략 8 대 2 정도로 미국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여론에서 일본 우위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소리로 비쳐졌다.



미국 우위론은 뉴욕의 빌딩숲, 디트로이트의 공업거리를 보여주며

미국의 산업역량이 일본보다 훨씬 뛰어다나는 것을 근거로 했다.



특히 일본이 미국에서의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면 미국은 석유를 금수조치 할텐데

그렇게 되면 일본이 미국에서 이길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 일본 우위론에서는 그저 일본에는 "무사도 정신"이 있어서

이길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아무래도 근거가 희박하게 보였다.



나 역시 내심으로는 미국 우위론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하와이에서 크게 이겼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경찰관들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본래 '외국인의 소요사태'는

그 자체로 경찰이 '강경진압'할 명분이 되었지만,

날뛰는 일본인들이 일본인 거리 밖으로도 뛰쳐나와서,

곳곳에서 욱일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반자이를 부르는 것을

저지하거나 막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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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거리에서 '탈출'한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토마스 선교사의 집을 찾아갔다.



나는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깊게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어가 중요하다는 숙부의 권유로 영어 공부를 하려고,

토마스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에도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도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진 듯 하였다.



본래 예배시간이 아닌데도 교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수근수근 거리고 있었다.



미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설립한 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특히 미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여 열렬한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에

일본의 미국 공격 소식을 듣고 많은 충격을 받은 듯 하였다.



심지어 미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우상시 하고 사대하는 이들까지 있었으니.

정신적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평소 국제정세를 알아보려고

미국에서 방송하는 단파 라디오를 청취하고 있었다.



나는 토마스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일본의 하와이 공격이 일본 언론에서만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 뉴스에서도 하와이 진주만의 기지가 일본에게 공격받았다고

방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와이 공격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 쿤. 재팬이 디클라레이션(declaration)…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 공격을 해왔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지금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선전포고 없이 공격한 일본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담화를 발표했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래도 미일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토마스 목사는 교회로 모여든 교인들이 동요하는걸 느끼고 긴급 예배를 진행하였다.

예배 내용은 평화를 기원하고, 하나님의 가호가 있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와장창!



그런데 예배를 마칠 때 쯤 갑자기 교회의 창문이 깨지며

주먹만한 돌덩이가 교회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귀축영미 물러가라!"

"서양놈을 내놔라!"



일본어만이 아니라 우리말로도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는 마치 폭동이 일어난 듯 수십명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당수는 일본인이엇지만, 우리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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