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5일 목요일

중립한국 제14화)

 중립한국 제14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나서 노인들이 모여서 향회 논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설날 행사나 사환미(社還米),

빈민구제, 도로 부역 같은 시골에서 일어나는

행정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시작했지만,

논의가 정리되자 점차 시국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런 시골의 노인들에게도 전쟁 소식은 깊은 관심사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이미 망했소.

장개석이 파촉(巴蜀)으로 쫓겨 들어갔는데

깊은 골짜기에서 앞으로 얼마동안 부지할 수 있겠소?

왕정위(汪精衛) 선생은 본디 애국자이고

일본의 도움으로 남경에 정부를 만들었으니,

왕 선생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의 장래에 좋지 않겠소?"


"장개석 장군은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오.

병법이 출중하니, 무작정 퇴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오.

틀림없이 왜군을 오지로 끌어들여 격멸하려는 것이니,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독일은 유럽을 모두 점령하였고,

일본이 장차 동양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만들게 되면,

그럼 우리나라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녕 그저 중립을 지키는 걸로 되겠습니까?"


"미국은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대국(大國)이고,

아라사도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대국이요.

영국은 각지에 식민지가 있어 역시 대국이니,

이 세 대국(大國)이 힘을 모았으니

독일과 일본이 어찌 쉽게 이기겠소이까?"


"내 소견으로는 공산적(共産敵)이야 말로

천하에서 가장 먼저 잡아야 할 도적이오.

충효(忠孝)의 도리를 모르는 금수(禽獸) 같은 자들이니.

공산적을 내버려두고서 어찌 천하에 화평이 있겠소?

먼저 온 나라가 화평하여 아라사의 공산적을 토멸하고 나면,

천하가 화평할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독일과 일본이 도리를 모르고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니

어찌 도리를 아는 나라들이 먼저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히틀러란 자는 제 군주를 업신여겨 

노애공(魯哀公)처럼 쫓겨난 황제를 모시지 않으니

오만하여 충효의 도리를 모르는 자가 분명하고,

일본군대는 남경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수히 죽였으니,

중국에서 민심을 잃고 있어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어르신들은 제각기 신문과 방송을 보면서

알게 된 국제정세로 고견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 시골 양반들이 이야기 하는 것만 들으면 제갈공명이로구나.'


신문의 외교 사설가에 뒤쳐지지 않게

열변과 논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모두 기껏해야 산골짜기 시골 향회에서

향임이나 맡고 있는 한미한 선비들이었다.


도시에 나가면 이런 시골 양반들의

고집스럽고 낡아빠진 구식 사고방식을

조롱하는 농담을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 --- --- --- --- --- --- --- --- --- --- ---



시골 노인들의 답답하고 어울리지 않는

국제 정치 이야기에는 곧 흥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며 무료함을 달랬다.


시골 풍경은 보기는 좋았지만 익숙해지자 금새 지루해졌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들만 많고, 도시처럼 즐거운 볼거리나

돈벌이가 될만한 거리는 별로 없는게 현실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윤태야. 시골 내려왔구나."

"아니, 민구야. 오랜만이다."


민구는 같은 마을에 사는 소작농 집안의 친구였다.


민구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지금도 시골에서 소작과 품앗이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도 고만고만하게 가난했기 때문에,

민구와는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냈다.


"담배 피울래?"

"어유. 이렇게 귀한걸."

"귀하긴 뭘."


내가 담배를 내밀자 민구는 웃으며 궐련을 받아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하였다.


"너 정말 신수가 훤해졌구나. 고향 떠낼 때하고는 다르게."

"뭘. 별로 바뀐 것도 없지."

"아냐아냐. 완전 서울 사람 같은데."


나는 부정했지만, 내가 봐도 조금 놀랄 정도로

나와 민구의 행색은 비교가 될 정도로 달라졌다.

어릴 때는 나나 민구 또래의 동네 친구들은 모두 똑같았다.


콧물을 질질 흘리며 다니던 꾀죄죄한 꼬맹이였다.

똑같이 이투성이 댕기머리를 흔들면서, 맨발이나 짚신으로

하얀 한복을 흙투성이로 더럽히며 산과 들을 쏘다니곤 하였다.


지금 나는 머리를 서양식으로 깔끔하게 이발하고 유행하는 중절모를 썻으며,

하얗게 빨아놓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반짝거리는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얼굴도 이발을 하고 목욕을 자주 해서 번들거리고 하얀 빛이 돌았다.


민구는 지금 같은 겨울 날씨에는 많이 추워보이는 여기저기를 기운 무명 한복 차림에

머리는 상투를 틀고 있었고, 발에는 낡아 빠진 버선과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농사일을 하느라 햇빛에 타버린 탓인지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쓰읍- 후우- 햐. 이거 담배 맛좋다. 무슨 담배가 꽃냄새 같은게 나."


민구는 담배연기를 폐 속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담배연기를 내뱉는 민구의 눈에는 시름이 가득해 보였다.


"향회(鄕會) 아직 하는거 같은데, 들어가보지 않아?"

"나야 뭐 무식하고 나이도 어리니까.

박진사 어르신(큰 할아버지) 같은

똑똑한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민구는 아직도 시끄럽게 논의를 하고 있는 사랑방 쪽을 곁눈질 하였다.


그러고보니, 신문에서는 향회를 비판하는 기사가 자주 나곤 하였다.


향회는 농촌 주민의 공동의 이익과 복지를 지향해야 하는 조직인데,

실제로는 언제나 양반 지주의 이익만을 대표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시골에서 향회를 몇 번 보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향회는 부유하고 문자께나 쓰는 양반들이 주도하곤 하였다.


"그러고보니, 어머님은 잘 게시냐?"

"요즘엔 병 때문에 잘 일어나지도 못하셔.

약이라도 써야 할텐데 돈이 많이 드니까.

우리 어머니 고생만 하게 하고…"

"내가 나중에 병문안 갈게."

"병문안은 무슨. 괜찮아."


민구는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어서,

동네에는 효자(孝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너도 참 효자다. 어머니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하고….

개척단이라도 갔으면 좀 형편이 나아지지 않겠냐?"


나는 이전에 민구에게 부산의 일자리나,

개척단 모집 같은걸 권유했던 적이 있지만,

민구는 그때마다 어머니를 돌봐야 하니 어쩔 수 없다며 거절했다.


"개척단도 건강한 사람이나 가는거지.

북쪽 겨울은 몇 배나 춥다던데,

병든 어머니를 데리고 북쪽을 어떻게 가."


민구는 예전에 북방 개척단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내켜하며 개척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그래 네 말이 맞아. 건강한 사람들도

개척단에서 고생하다 병걸리고 한다더라."


북방 개척단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쉬운건 아니었다.


북방 지역은 남쪽 보다 훨씬 추웠고,

거칠고 버려진 황무지를 개척하느라,

고생이 극심한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민구는 개척단에 들어가기에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민석이 형은 어떻게 지내?

장학금 받고 서울에 공부하러 갔잖아.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냐?"


"아. 석이형…."


민석이 형은 민구의 형이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민석이 형은

눈에 뛰게 머리도 좋고 공부를 잘해서

향회(鄕會)에서 장학금을 모아서

서울로 공부를 하러 보냈다.


서울에서 공부도 하고 자리도 잡았으면,

이젠 고향에서 고생하는 가족을 돌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석이형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출판사에 들어갔다가 얼마전에

무슨 사외 뭐라는걸 했다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왔어…."


"뭐? 석이형이 사회주의를?"


"응 그래. 그 사회주의 운동인가 그런걸 했다고."


민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크게 놀랐다.


사회주의는 수십년 전에 서양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상이었다.


혁명을 하여 정부를 무너뜨리고 계급을 타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야 한다는 사상이었는데,

우리나라에도 들어와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젊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은 사상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불충(不忠)과 불효(不孝)를 조장하며,

국가(國家)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하여,

무척 단속하고 경계하였다.


특히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더욱 탄압이 강해졌다.


러시아 황제 일가가 혁명당에게 시해되었는데,

사회주의자들은 군부(君父)를 몰라보는

불효(不孝)·불충(不忠)한 무리라 하여,

사회주의 조직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던 것이다.


"석이형 경찰에서 크게 혼이 나서 지금은 집에서 누워지내고 있어."


"그럼 석이형이 고문을 받았다는 거야?"


"그래.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니까."


대학에서 똑똑하고 머리 좋은 청년들이

사회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석이형이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다는 것은 처음으로 들었다.


석이형도 민구처럼 착하고 효자였기 때문에

불의한 사상에 빠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착한 석이형이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까지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